Chapter 07.
Written by. Jetfire2012
Translated by. BlackS
부드럽고 따뜻한 숫말의 입술이 뿔을 섬세하게 훑는다.......
반쯤 잠든 상태에서, 래리티는 그 느낌이 썩 나쁘지는 않다고 느꼈다.
“아.......으음.......”
나른한 숨소리를 내뱉으며,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코트의 양털과 검은 담요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어머, 실버 후브스 제독님.......오늘이 우리 첫 데이트인데.......벌써 이러시면.......흐응.......”
한동안 신음 섞인 잠꼬대를 하던 래리티의 눈이 문득 떠졌다. 당연히, 그녀는 멋진 데이트나 황홀한 밤을 보내고 있진 않았다.
“.......?”
<.......?>
그런데 뿔에서는 여전히 ‘그렇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 래리티는 시선을 위쪽으로 향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뿔이 레인보우 대시의 유아적인 잠꼬대에 희생되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꺄아악!”
래리티는 비명을 질렀다. 새하얀 뿔에서 마력이 폭발했고, 푸른 페가수스의 머리가 뒤쪽으로 튕겨져 나갔다.
“우어악! 뭐야뭐야뭐야뭔데?!”
장밋빛 눈동자가 잠에 취한 와중에도 부릅떠졌다. 레인보우 대시는 날개를 파닥대며 몸을 비틀었다.
“뭐꼬.......?
이 사단에 애플잭도 하품을 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스트레칭을 하려 했으나, 둘둘 말린 세 장의 담요와 한 장의 코트 안에 스트레칭을 할 만한 공간이 있을 리 없었다.
“벌써 아침이가?”
“모르겠어. 방금 일어났거든.”
래리티가 대답했다.
“아 맞나? 내도 방금 일어났데이. 아무래도 아침인갑네. 레인보우, 니는 어떤데?”
“날개에 쥐났어.”
대시는 아래턱을 상하좌우로 몇 번 움직이며 대꾸했다.
“하지만 괜찮아. 방금 일어난 일에 비하면 말이지.”
“음, 알겠데이.”
애플잭은 눈썹을 한 번 으쓱이고는 화제를 돌렸다.
“그건 글코, 이제 슬슬 이 담요말이에서 나가야지 않긋나? 어제 왼쪽으로 돌면서 말았으니께, 오늘은 오른쪽으로 돌면 풀릴 거데이. 셋에 간다. 다들 준비됐나?”
“준비 완료!”
“언제든지.”
“하나, 둘, 셋!”
애플잭의 신호에 맞춰 일행은 오른쪽으로 굴렀다. 담요 고치가 서서히 얇아지며 찬 공기가 스며들어왔다.
래리티의 코트를 마지막으로 담요 고치는 완전히 풀어헤쳐졌고, 일행은 축축한 검은 바위 위로 굴러 나왔다. 어둠에 눈이 익자, 하얀 벽으로 사방이 막혀 있음이 보였다.
“거, 눈이나 좀 그쳐있으면 좋겄는디.”
애플잭이 말했다.
레인보우 대시는 위쪽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본래 있던 눈 동굴에서 수직으로 파고 내려왔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눈 동굴의 천장을, 공기구멍을 뚫었던 그 천장을 볼 수 있었다.
그 구멍에서 주황색 햇빛이 보인 것 같았다.
“확인해보려면 이 방법뿐이지.”
레인보우 대시는 엉덩이를 뒤로 쭉 빼며 날개를 거세게 쳐댔다. 근육에 예열 작업을 마친 그녀는 멋진 무지갯빛 궤적을 남기며 제 몸을 쏘아 올렸다.
눈 동굴의 천장은 1초도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이 났다. 살짝 녹은 눈 파편과 물방울이 무지갯빛을 반사하며 온 사방으로 튀었다. 찬란한 햇빛이 두 포니의 뒤에 도사리는 어둠을 몰아냈다.
“흐음. 눈은 확실히 그친 것 같은데.”
래리티가 자신의 검은 담요를 정리하며 말했다. 애플잭은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풀고, 자신의 담요 두 장을 개기 시작했다.
“저 말괄량이 가스나는 맨날 저런 식이제. 생각읎이 냅다 달려들고.......언젠가 저러다가 한 번 큰 코 다치지 싶다.”
“어머, 새삼스럽긴. 그게 어디 하루이틀 일이니?”
< “저 말괄량이 가스나는 맨날 저런 식이제. 생각읎이 냅다 달려들고.......언젠가 저러다가 한 번 큰 코 다치지 싶다.”>
<“어머, 새삼스럽긴. 그게 어디 하루이틀 일이니?”>
저도 모르는 새에 화제의 중심에 오른 페가수스는, 날아오를 때처럼 순식간에 다시 내려왔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구멍의 가장자리를 부수어 더 크게 만들었다. 그러자 더 많은 햇빛이 들어왔다.
“폭풍이 완전히 멎었어!”
레인보우 대시는 천진난만하게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엔 순수한 기쁨이 가득했다.
“하늘 완전 맑아!”
애플잭은 다 개어진 담요를 안장 가방에 넣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거 잘 됐네, 요 귀염둥이 가스나야.”
그녀는 레인보우 대시가 만든 수직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사방이 온통 눈이라, 발굽을 디디며 올라갈만한 부분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근디, 나랑 래리티 좀 여기서 꺼내줄 수 있긋나?”
“물론이지!”
페가수스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이 우울한 곳에서 빨리 나가자고!”
애플잭과 래리티는 재빨리 짐을 쌌다. 래리티는 안장 가방을 완전히 몸에 고정시키고 그 위에 코트를 입었다.
레인보우 대시는 래리티의 앞다리 아래를 껴안고 날아올라 그녀를 찬란한 햇빛 아래로 갖다놓았다. 래리티가 보니, 눈보라는 대시의 말대로 완전히 멎어 있었다. 하늘은 아침햇살의 광휘에 물들어 있었고, 하얀 구름이 몇 점 떠다니고 있었다. 유난히도 어두웠던 지난밤 때문이었을까, 래리티는 포니빌에서는 특별할 것도 없었던 이 풍경이 유난히 아름다워보인다고 생각했다.
이 교훈의 순간은 배가 꼬르륵대는 소리로 끝이 났다.
.......확실히, 어젯밤에 아무것도 안 먹긴 했지.
래리티는 마법으로 코트를 들고 왼쪽 안장 가방을 열었다. 잠시 옷가지 사이를 뒤적댄 끝에, 그녀는 호일에 싸인 그래놀라 바 세 개를 찾아냈다.
대시가 눈 동굴에서 애플잭을 들고 올라왔을 때, 배가 고팠던 유니콘은 이미 그래놀라 바 한 개를 먼저 먹고 있었다. 그녀는 남은 두 개는 기꺼이 친구들에게 양보했다.
“이거라면 산을 내려가는 동안은 문제없이 버틸 수 있겠제.”
애플잭은 바삭바삭하고 달콤한 그래놀라 바를 씹으며 말했다.
대시는 그래놀라 바를 통째로 입에 넣었다.
“암냠냠. 빨리, 가자.”
그녀는 게걸스럽게 바를 씹어대며 중간 중간 말을 이어갔다.
“눈,은 이제 질,렸어.”
남은 포장지는 래리티의 안장 가방에 넣고, 일행은 다시 길을 떠났다. 눈보라가 멎은 덕에 시계(視界)는 전날보다 양호했다. 일행은 전방에 길목이 확연히 넓어지는 구간이 있음을 확인했다.
30분 만에 눈밭을 통과한 일행은 한껏 넓어진 길목에 도달했다. 그 널찍한 길에는 오른쪽으로 급격히 휘어지는 커브길이 있었다. 일행은 그 휘어진 길로 들어섰고.......
“우와!” “이이이--하!” “어머, 세상에!”
극적으로 바뀐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세 포니들은 자신들이 마침내 산악지형에서 벗어났음을 인지했다. 가파르고 높은 바위 절벽도, 낙석도, 산등성이 사이에 눅진하게 끼어있던 구름도 없었다. 지난 수일 간 겪었던 온갖 험한 것들이 지금 보이는 세상의 전경을 영접하기 위한 시련이었다고 한다면, 어제까지의 고난도 납득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황금이었다.
떠오르는 태양의 광휘가 반짝이는 불꽃을 일으켰다. 일행은 파도처럼 경쾌하게 일렁이는 끝없는 황금의 들판을, 내려다보면서도 우러러 보았다. 들판은 시야가 닿는 곳 어디에든지 있었고, 닿지 않는 곳에도 있을 것이었다. 작은 세 포니가 경탄에 잠긴 그 순간에도 태양은 반짝이는 불꽃을 하사하며 떠오르고 있었다. 그늘에 잠겨있던 서쪽 들판이 그 은혜를 받아 비로소 황금의 자태를 갖추게 되었다.
황금빛 물결은 그렇게 넓어지고 있었다. 그 끝을 볼 수 있는 영광은, 모든 전경을 빚어낸 태양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다.
드넓은 대지를 마주한 어스 포니의 심장이 요동쳤다.
“그래서, 여가.......”
채 말을 있지 못하고, 그녀는 페가수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길드데일이지.”
레인보우 대시는 발굽을 지평선보다 조금 더 높게 들고 쭉 뻗었다.
“그리고 저 쪽이.......”
래리티와 애플잭은 대시의 발굽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올렸다. 드넓은 황금빛 들판 너머, 그 곳은 푸른 보랏빛의 아지랑이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뒤편에 있는 여행의 종착점만은 날카로운 실루엣을 똑똑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치백 산악지대인 거야?” 래리티가 물었다.
“맞아. 분명해. 내가 그동안 날면서 봐온 게 맞다면, 길드데일은 아치백 산악지대랑 드라켄리지 산맥 사이에 세로로 뻗어 있는 나라거든. 우리는 길드데일을 짧은 가로 방향으로 가로 지르면 되니까, 뭐,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라믄 더 기다릴 게 뭐 있긋노?”
열망에 찬 애플잭의 발굽이 전율했다.
“빈둥대지 말고 어여들 가자, 이 가스나들아. 아직 갈 길이 멀데이!”
애플잭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른 걸음으로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좋은 자세야, AJ! 가보자고!”
대시가 환호했다. 그녀는 빠르게 날개를 쳐대며 애플잭을 따라 쇄도했다.
래리티는 울상이 되어 징징댔다.
“잠깐만, 같이 가!” 그녀는 질척한 눈과 울퉁불퉁한 바위들을 넘으며 혼신의 힘을 다해 둘을 쫓았다.
-
그 후 몇 시간 동안, 세 포니들은 여러 커브를 통과하며 산길을 내려갔다. 가끔은 중간 봉우리 사이의 계곡길을 오르기도 했지만, 여로는 대체로 산을 빙 둘러가는 내리막길이었다. 고도가 낮아질수록 기온은 올랐고, 눈도 점점 녹아 없어졌다.
이른 아침이 지나고 오전 중이 되자, 일행의 여로에는 쌓인 눈더미 대신 물웅덩이가 생겼다. 애플잭과 래리티는 각각 조끼와 코트를 벗었다. 바람 역시 한결 부드러워졌고, 애플잭은 바싹 조였던 모자끈을 느슨하게 했다.
세 포니 중 제일 먼저 부드러운 흙바닥에 발굽을 디딘 건 어스 포니였다. 정오가 조금 지날 무렵이었다. 산 바로 아래의 응달진 들판에서 자람에도 불구하고, 풀들은 생기 있게 그녀를 맞이했다. 드높이 떠오른 태양은 이른 아침의 것과는 다른 백광(白光)을 발하고 있었지만, 들판의 풀들은 여전히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오렌지 색 어스 포니는 초록빛 대지의 품으로 돌아왔음에 황홀함마저 느꼈다. 그녀는 모자와 빌려 입은 스웨터를 벗어 던지고 크게 자란 풀들 위로 제 몸을 던졌다. 부드러운 생명의 요람과 풍요로운 시골의 향기가 어스 포니에게서 기쁨의 웃음을 자아냈다.
래리티는 마법으로 핑크색 스웨터를 벗었다. 새하얗고 우아한 유니콘은 풀밭을 뒹구는 오렌지 색 어스 포니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따스한 대기와 평지로 돌아온 것은 그녀에게도 기쁜 일이었다. 그렇다고 ‘저런’ 방식으로 즐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자유롭게 거친 공기가 느껴졌다. 낯선 길드데일의 바람이 영혼을 북돋으며 모험의 손짓을 보내오는 것 같았다.
“어쩐지 달리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걸.”
그녀는 자신마저 놀랄 정도로 분명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레인보우 대시는 개구지게 웃으며 래리티를 내려다보았다. 어떤 아이디어를 떠올린 그녀는 날개를 접고 지상에 발굽을 디뎠다.
“그동안 너희들하고 속도 맞춘다고 고생 좀 했거든? 근데 있지, 만약 내가 너희들처럼 어스 포니나 유니콘이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시간 낭비를 했을 것 같지는 않단 말야. 그래서, 나도 한 번 달려보고 싶어졌어.”
대시의 도발에 애플잭은 두 앞다리를 들어 올리며 조소했다.
“인제 지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갑제? 하긴, 니가 내헌티 어디 한두 번 졌나?” 그녀는 모자를 머리 위에 푹 눌러썼다.
“뭐래?” 대시가 일축했다.
“난 한 번도 진적 없어. 특히 너한테는.”
<“난 한 번도 진적 없어. 특히 너한테는.”>
“어휴, 셀레스티아님 맙소사. 이런 포근하고 평화로운 곳에서 갑자기 경주라니!”
래리티는 자신의 스웨터와 애플잭이 벗어놓은 스웨터를 챙기며 궁시렁 댔다. 그녀는 두 스웨터를 잘 접어 안장 가방에 넣은 뒤, 목에 둘렀던 하늘색의 린넨 스카프도 끌러냈다.
“너희들끼리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경주 안 해도, 난 평상시에 너희들 따라가는 것만 해도 벅차다구.”
“가스나야, 가방에 든 게 많으니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제.”
애플잭은 래리티에게 핀잔을 주곤 다시 대시에게 주의를 돌렸다.
“어쩔끼가, 레인보우? 먼저 점심 먹으려고 멈추는 쪽이 지는 걸로?”
대시는 앞발굽을 지면에 꾹 누르며 출발 자세를 잡았다.
“그거 좋지. 그럼 준비하고.......”
“준비.......”
애플잭이 막 출발 자세를 취하려는 찰나였다.
“출발!” 대시가 제멋대로 구령을 넣고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엥? 야! 반칙 쓰지 마라!”
애플잭은 벌써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멀어진 푸른 형체를 향해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이 사기꾼 가스나! 퍼뜩 안 돌아오나!”
“졸고 있었던 거야, AJ? 그러다 진다!” 대시가 어깨 너머를 흘깃 쳐다보며 애플잭을 놀려댔다.
애플잭은 그르렁대며 콧김을 내뿜었다. 그녀는 온힘을 다해 레인보우 대시를 쫓아 내달렸다.
“저기, 만약 내가, 배고파지면, 어떡하라구?!”
래리티는 폭주하는 두 포니들을 겨우겨우 쫓아가며 악을 써댔다. 열이 올라 붉어진 온몸의 빛깔이 새하얀 털가죽 위로 여실히 드러났다.
“내가, 니들 사이를, 모르겠니?! 둘 중 하나가, 어휴, 굶어, 나자빠질 때까지, 안 끝날 거 아냐?! 야! 잠깐만, 너무 빨리 가지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행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래리티는 생전 달려본 적도 없는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세 포니들은 끝없이 넓은 평원을 가로질렀다. 쉴 새 없이 지면을 박차는 여섯 개의 발굽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엔 발굽에 짓밟혀 꺾인 풀들만이 남았다.
일행은 낮은 언덕을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도 하고, 개울물을 온 사방으로 튀기며 지나가기도 했다. 도랑과 제방도 몇 번이나 뛰어 넘었다. 태양은 하늘 높이 떠 있었고, 탁 트인 풍경은 보기로도 실제로도 따뜻했다.
“멈-춰! 그만!”
광기어린 질주는 래리티의 항복으로 끝났다.
“그만들 뛰어! 우리, 도대체 얼마나, 뛰어야 하는, 거야?”
애플잭과 레인보우 대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리기를 멈췄다. 그들의 발굽이 부드러운 대지에 긴 스키드 마크를 남겼다.
래리티는 몸을 질질 끌며 두 포니들에게 향했다. 그녀의 털가죽과 갈기가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잠깐, 헤엑.......이제 더 이상, 못 가겠어!”
새하얀 유니콘은 멈춰선 친구들 곁에 도착하자마자 풀밭에 누웠다. 희고 곧게 뻗은 예쁜 다리가 꺾인 풀 마냥 시들하게 늘어졌다. 끝없는 질주에 혹사당한 다리와 온몸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애플잭과 대시는 래리티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래리티는 고개만 겨우 돌려 그들과 시선을 맞췄다.
대시가 장난스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못 쫓아오겠어, 래어?”
“지금, 누구, 헤엑, 놀리니?! 후우.”
래리티는 쌕쌕거리며 쏘아붙였다. 그녀의 배에서 꼬르륵대는 소리가 났다.
“지치고 배고파! 배고프고 지쳐! 니들 진짜 골 때리는 포니들이야! 알아?! 배도 안 고파? 벌써 점심 먹을 시간이 한 시간은 지났어!”
“슬슬 멈출 때가 된 것 같긴 했다.”
짐짓 태연한 척하던 애플잭의 배에서도 꼬르륵대는 소리가 났다. 애플잭은 무릎을 굽히며 머쓱하게 자리에 앉았다.
“헤, 갑자기 억수로 배고프네. 아무래도 아깐 뜀박질하느라 식욕을 못 느꼈었는갑다.”
그녀는 키 큰 풀 한 무더기를 덥석 물었다. 풀이 워낙 크게 자라있던 덕에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었다. 입에 가득 담긴 풀을 씹어보니, 평소에 먹던 것보다 더 식감이 좋았고 진한 맛이 났다.
래리티는 발굽을 버둥대며 몸을 일으키곤 풀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입에 넣은 풀을 다 씹어 삼킨 뒤, 그녀는 이렇게 평했다 : “좀.......거친데. 심지가 굵은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렇지 않아?”
“섬유질이 많아서 그렇데이. 배변활동에 좋을끼다.”
“으엑.”
애플잭은 대시가 풀의 가장 부드러운 끝부분만 잘라 먹으며 분주히 날아다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모양새가 마치 지나가는 길에 있는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양 떼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저 가스나가 갑자기 와 저렇게 며칠 굶었던 아처럼 굴지? 산에 있을 땐 멀쩡해 보였던 것 같은디.......아이고마, 혹시 계속 배고팠는데 티를 안냈던 거 아이가?
“레인보우. 식사는 잘 하고 있나? 거, 우리가 산에 있을 때 좀 많이 못 먹긴 했제?”
“아, 애플잭.” 대시는 풀을 우적우적 씹으며 대답했다. “난 괜찮아. 그냥 좀 배가 고플 뿐이야.”
“페가수스들은 신진대사가 빠르다 카더만. 혹시 식사할 시간이 더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하그라. 괜찮으니께.”
“거껑 하이마, 애훌잭. 지짜 갱차나.”
레인보우 대시는 입 안 가득 물고 있던 풀을 한 번에 꿀꺽 삼켰다. 그리곤 또 한 입을 크게 베어 물었다.
“난 배고픈 만큼 먹어. 늘 그랬지. 혹시 너희 걷는 포니들이 내가 식사하는 사이에 먼저 가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아. 난 금방 따라 잡을 수 있어.”
“내가 볼 적에는, 그건 영 안 좋은 생각이지 싶데이. 게다가 도리라는 게 있지 않긋나. 만약 니가 식사 때문에 멈춘다면, 우리도 멈춰서 기다려 줘야제.”
“그래. 그냥 가버릴 순 없어. 그건 무례하잖아.”
래리티도 애플잭을 거들고 나서자, 대시는 짓궂게 웃었다.
“그니까, 내가 너희들보다 너무너무너무 빠르다는 게 영 신경 쓰이는 거지?”
“으휴, 레인보우. 언제까지 그렇게 매사 경쟁하면서 살 거야?”
“느려지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늙는 거야.” 대시가 대답했다. “내가 늘 더 빨라지려는 이유지.”
“내는 글케 생각 안 한 데이.” 애플잭이 받아쳤다.
“내가 봤을 땐, 니 소중한 시간을 들여서 할 만한 것들이 경쟁 말고도 많이 있을끼다. 맨날 글케 서두르기만 하면, 삶의 부드럽고 온화한 것들을 즐길 수가 없게 되제.”
“어머, 애플잭, 자기도 그걸 이해하는구나. 참 기쁜 일이야.”
래리티는 풀을 씹어 삼킨 뒤 주변을 조금 둘러보았다.
“그건 그렇고, 이 말은 해야 되겠어. 길드데일은 확실히 사랑스러운 땅이긴 하지만, 눌러 살고 싶은 곳은 아냐. 여긴 나보단 레인보우 대시에게 어울리는 땅인 것 같아.”
“엥, 그래?”
레인보우 대시가 래리티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왜?”
“그냥 내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야.”
새하얀 유니콘은 고개를 조금 들고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혹시 이 땅에 뭔가가 없는 것 같다고 느낀 포니, 있니?”
애플잭과 레인보우 대시는 래리티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돌렸다. 주변엔 온통 넘실대는 황금빛 들판 뿐 이었다. 어딜 봐도 끝이 보이지 않는-
먼저 위화감을 느낀 건 애플잭이었다.
“.......건물. 건물이, 한 채도 없는 것 같데이.”
“좀 더 정확하게는,”
래리티는 잠시 숨을 골랐다.
“집도, 농장도, 심지어 강을 건너기 위한 다리도 없지. 발전하는 문명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인프라조차 없어. 길드데일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운 모습은 갖고 있을지 몰라도.......문명화는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아. 실은, 난 이제 걱정되기까지 하거든. 도대체 ‘방랑하는’ 포니들이란 게 뭘까? 그 포니들한테 문화라는 게 있을까? 말은 할 줄 알까?”
“야, 건물 좀 안 짓고 산다고 멍청이라는 건 아니잖아.”
레인보우 대시가 발끈하며 나섰다.
“난 이런 식의 자유와 개방감이 맘에 들어. 땅이지만 하늘같아. 그 어떤 포니도 울타리나 경계에 의해 통제되지 않잖아.”
“그 자유로운 하늘에도 클라우드 데일이 있단다. 레인보우 대시.”
“아, 래리티,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 자유로워진다는 게 뭔지 생각이나 해본 적 있어? 넌 내가 말하는 ‘자유’란 게 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구.”
“뭐, 뭐라고?”
래리티는 거칠게 콧김을 내뿜었다.
“하! 난 자유가 뭔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답니다, 마담.”
그녀는 분노에 찬 목소리에 냉소를 담아 쏘아붙였다.
“그리고 생각이나 해본 적 있냐고? 그런 식의 근거 없는 비방은 삼가주면 고맙겠어. 나는 다른 자유를 포기해야만 얻을 수 있는 자유도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대시가 일갈하며 끼어들었다.
“자유를 포기하면, 그건 덜 자유로워지는 거야. 간단하잖아.”
“자유는 기브 앤 테이크야.”
래리티가 다시 반박했다.
“이퀘스트리아에서 우린 우리가 하고 싶은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어. 예를 들면, 우린 포니를 죽일 자유는 없어. 하지만 그 대가로 언제 죽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질 순 있지. 이건 문명화된 사회라면 어느 곳에서나 통용되는 이야기야. 설령 길드데일의 포니들이 그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해도, 동시에 그들은 수많은 걱정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야 할 거야. 이퀘스트리아에 사는 우리들하고는 다르게 말이지. 우리는 살마(殺馬)의 자유를 포기한 대신 안전한 생활의 자유를 얻었으니까.”
“그건 처음부터 잘못된 예시야! 꼭 살마를 금지하는 법이 있어야 안전해지는 건 아니잖아! 그냥 포니들끼리 서로 예의를 지키고 얼간이처럼 굴지만 않으면 돼! 그러면 처음부터 법으로 자유를 제한할 필요가 없어진다구.”
새하얀 유니콘은 안타깝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세상엔 예의 없는 얼간이들이 넘쳐.......언제나 그래왔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자기야. 나도 그런 세상이 좋다는 게 아니야. 하지만, 실제로 세상이 그런 걸. 그러니 우리는 사회가 어떤 행동을 금지할 때 그것을 따라야 하는 거란다.”
< “하지만 세상엔 예의 없는 얼간이들이 넘쳐.......언제나 그래왔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세상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야?”
푸른 페가수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그러니까 넌 뭔가를 하려면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하고, 허락 받지 않은 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나라에 살아도 좋다는 거야?”
“말했잖니. 기브 앤 테이크라고. 나도 그런 나라에서 살고 싶진 않아. 하지만 마찬가지로 내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나라에서 살고 싶지도 않아. 그건 기브 앤 테이크의 균형을 깨트리는 거니까.”
“이건 좀 당연한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 봐. 만약 셀레스티아 공주님이 아니라 어떤 나쁜 포니가 우리의 지도자였다면? 만약 우리의 지도자가 우리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권모술수를 부린다면? 그럼 어쩔 거야? 그런 곳에서 사느니 나는 차라리 그 어떤 제약도 없는 곳에서 살 거야.”
“네가 말한 그 둘 중에 골라야 한다면, 나도 너처럼 할 거야!”
래리티가 역설했다.
“문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런 흑백논리로만 돌아가진 않는다는 거지. 그 중간 즈음 어딘가에서 우린 합의점을 찾아야 해.”
레인보우 대시와 래리티의 시선이 강렬하게 부딪혔다. 묵묵히 둘을 지켜보던 애플잭을 놀라게 할 정도로.
왐마, 요 가스나들, 마냥 왈가닥들인 줄 알았더만, 제법.......
애플잭은 푸른 페가수스가 자유 따위의 추상적 개념에 대해 이토록 열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모르고 있었다. 같은 주제에 대해 새하얀 유니콘 또한 이렇게 많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예상 외였다. 사실 그녀는 이 논쟁이 어떻게 흘러갈 지 조금 더 지켜보고 싶었다. 두 친구들이 서로 싸우는 걸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태양은 조금씩 기울고 있었고, 소중한 친구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일행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크흠, 가스나들아.”
애플잭은 부드럽게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해 있을 때 빨리 가야지 않긋나? 슬슬 출발해야제.”
먼저 시선을 거둔 건 래리티였다.
“그 말이 맞아, 애플잭. 출발하자.”
그러나 그녀는 다시 레인보우 대시에게 고개를 돌렸다.
“레인보우 대시, 오해하진 말아줘. 나도 너만큼이나 행동의 자유를 사랑한단다. 정말이야. 하지만 모든 포니들이 전부 다 그렇게 할 수 있게 된다면, 그건 혼돈 밖에 불러오지 않아.”
그 때까지 대시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하지만 서서히 부드럽게 바뀌더니, 종극엔 편안한 미소를 띠었다.
“근데 말야, 실은.......네 말이 맞는 것 같아. 하지만 네가 말한 그 합의점이란 걸 어떻게 찾을 수 있을 진 모르겠어. 난 그냥 아무 포니도 통제하고 싶지 않거든. 뭐, 그게 내가 공주가 될 수 없는 이유겠지.”
“어쩌면 내가 길드데일의 포니들을 오해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아직 그 포니들을 직접 만나보진 않았잖아. 그 친구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사회적 합의는 있을 거야. 그들에 대한 판단은 조금 더 보류해야겠어.”
“굉장한 결정인데, 래리티.”
대시가 말했다.
“생각해보니까 이퀘스트리아에 사는 내가 진정한 자유에 대해 논하는 게 조금 바보 같기도 하네. 우린 지켜야할 법이 있지. 그 법의 보호를 받으면서 안전하게 살고 있고.......이런 게 균형이겠지.”
“균형 하니까 말인데, 페이스 균형을 맞추려면 우리 이제 좀 천천히 가도 되지 않을까?”
래리티는 애플잭을 향해 활짝 웃어보였다.
“점심 먹기 전에 엄청 달렸잖니, 응?”
“뭐, 조금은 천천히 가도 괜찮겄제.”
애플잭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드라켄리지 산맥에서 시간을 좀 잡아먹었으니, 이런 쉬운 지형에서는 최대한 시간을 아끼고 싶단 말이제. 길드데일에서 다음 지역까지 가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또 뭐가 튀어나올지도 전혀 모르니께.”
“어휴, 그래, 그래.......” 래리티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레인보우 대시가 깔깔 웃으며 래리티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번엔 조금 천천히 갈게, 래어.”
“다 준비됐제? 그럼 출발하제이!”
애플잭이 금발의 꼬리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세 포니들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대시와 애플잭은 평소보다 조금 느긋하게 달렸으나, 그마저도 래리티가 따라잡기엔 쉬운 속도가 아니었다.
-
오후부터 저녁 시간이 될 때까지, 애플잭의 마음속에는 두 친구들이 나눴던 토론의 여운이 남아있었다. 애플잭은 달리는 와중에도 틈틈이 주변을 살폈는데, 지평선 어느 쪽을 봐도 정착해 살아가는 포니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암만 방랑 포니들이래도, 길드데일 아들은 도대체 뭘 먹고 사는 기가? 설마 풀떼기만 먹고 사나?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집도 안 보이더만, 그냥 밖에서 자나? 망아지들은 핵교는 댕기나? 아니, 애초에 핵교가 있긴 한가?
생각하면 할수록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렇다 할 음식도 거처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간다면, 포니가 여타 동물들과 다를 게 뭔가?
래리티, 고 가스나 말이 맞는 것 같데이.
망아지들이 안전하게 성장해 그들의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할 수 있으려면, 어느 정도의 자유는 제한되어야 한다. 교육, 친구, 미술, 문화 등, 포니들에겐 완전한 자유 따위보다 더 필요한 것들이 많이 있다. 삶에는 단지 살아남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어야 했고, 이는 애플잭이 파종 시기에도 애플블룸을 단호하게 학교로 보내는 이유였다. 그래니 할며니는 백날 책이나 파봐야 성공하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호통을 쳤지만, 애플잭은 교육에는 당장의 경제적 안정보다 더 큰 의미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빅 매킨토시는 어릴 때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는 늘 그것을 후회했고, 최근엔 그 후회가 배우는 것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교육은 포니를 단순한 일꾼이나 생명체 그 이상의 것으로 만든단다.
오렌지 색 어스 포니는 어머니의 이 말을 단 한 번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애플잭은 상념을 멈췄다. 검은색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일행을 기준으로 왼편의 평원에 서 있었다.
“야들아.”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친구들을 불렀다. “저 왼쪽에 저거, 다들 보이나?”
“똑똑히 보여!”
레인보우 대시가 날개를 치며 급하게 방향을 전환했다.
“빨리 가서 확인해보자!”
친구들이 말릴 새도 없이, 그녀는 무지갯빛 궤적만 남긴 채 날아가 버렸다. 애플잭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그 뒤를 따랐고, 래리티도 두 친구를 바짝 쫓아갔다.
새로 발견한 무언가에 래리티와 애플잭이 도착했을 때, 대시는 이미 그 검은 형상의 한 가운데에 앉아있었다.
그것은 높은 비석이었다. 표면은 거칠었지만 지면과 수직으로 만나며 곧게 서 있었고, 각 꼭짓점들이 서로 평행한 높이에서 균형 있게 이어졌다. 모든 면에 어떤 문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드라켄리지 산맥 정상의 동굴에 새겨져 있던 것과는 달리 쉽게 읽혀졌다.
<그것은 높은 비석이었다.>
“이퀘스트리아 어(語) 하고 비슷한 것 같지 않니?”
“으흠. 그런 것 같은데.”
래리티의 말에 대시가 맞장구를 쳤다.
“단어 몇 개가 좀 이상하긴 한데, 그래도 대체로 이해는 된단 말이지. 이게 만약 길드데일에서 쓰는 언어라면, 앞으로 만나게 될 포니들하고 의사소통하는데 별 문제는 없을 거야.”
“이 비석이 고대의 것이 아니라면, 말이지. 시간이 많이 지나서 언어가 변했을 수도 있어. 어쩌면 이들도 먼 옛날엔 이퀘스트리아 어를 썼지만 지금은 아니라던가?”
래리티가 조금 비관적인 가능성을 제시했다.
“어쨌든, 여기 써진 언어는 요새 쓰이는 우리말이랑 거의 똑같데이.”
애플잭이 말했다.
“트와일라잇이 그랬었다 아이가. 고대 이퀘스트리아 어는 현대 이퀘스트리아 어랑 달랐다고. 글케 생각해보면 길드데일 아들의 옛날 거랑 우리 이퀘스트리아의 요즘 거가 이 정도로 비슷할 리는 없데이. 내는 이게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졌다고 본다. 아님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거나.”
비석의 앞면 위쪽에는 EAST 라는 글자가 대문자로 크게 쓰여 있었다. 그 아래에는 조금 작은 글자들이 가로 방향으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이 곳은 산등성이 사이 황금 평원을 다스리는 길드데일의 영지임을, 역대 데일 군주들과 그 직계 혈통들의 이름으로 엄숙히 선포하노라. 친우들은 우리를 두려워 말 것이나 적들은 우리를 두려워 할 것이니. 군주 브로드 위더스의 이름으로. 데일의 군주. ____년.]
대시는 안도의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적들은 우리를 두려워 할 것이니.] 라잖아. 얘들도 그렇게 막 나가는 친구들은 아닐 거야.“
“그 앞부분에 있는 말도 맞는 말이길 빈데이.”
애플잭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트와일라잇이 줬던 책에서 보면, 갸들은 이방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으니께.”
“그런데 이퀘스트리아에 대한 말은 없네.” 래리티가 지적했다.
“뭐.......내도 집에 있을 땐 길드데일에 대해선 들어본 적도 없었데이. 포니빌에서 며칠 걸어서 산 하나만 넘으면 되는 거리에 있는데도 말이제. 혹시 이퀘스트리아랑 길드데일은 그다지 교류가 없었던 거 아이가?”
“그나저나 저건 무슨 뜻일까?”
대시가 EAST 글씨의 위쪽, 즉 비석의 가장 윗부분을 가리키며 물었다. 무언가가 퍼지는 것 같은 모양이 검은 석판에 새겨져 있었다. 그 모양은 금으로 새겨져 있었는데, 아랫부분은 살짝 펴져 있었고 중간 부분은 붉은색으로 가운데가 그어진 채 안쪽으로 휘어져 있었다. 제일 윗부분도 아랫부분과 비슷한 정도로 펴져 있었다.
“길드데일의 상징 같은 건가?”
“아무래도.......묶여있는 건초다발인가 싶기도 헌데.......아님 풀이던가. 내 생각에는 풀 같데이. 그게 더 가능성이 있겠제.”
“[산등성이 사이 황금 평원.]”
래리티는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부드럽게 따라 읽었다. 그러나 글에서 느껴지는 거칠고 야생적인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북과 뿔피리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늘 문명 속에서 살아왔다. 물론 화려함과 북적임의 극치를 달리는 캔틀롯과 매인해튼에서 살았던 건 아니지만, 적어도 거리가 잘 닦여있고 일주일에 두 번씩 쓰레기가 수거되는 곳에서 살았다.
애플잭은 평생 농장을 떠나본 적이 없다고 했지.......나도 별반 다를 거 없어. 지금껏 여행이라곤 해본 적도 없으니까. 지금은 이 이상하고 거친 장소에 있지만 말야.
바람이 갈기와 목에 감긴 스카프를 거칠게 훑고 지나갔다. 래리티는 비석의 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타오르는 주황빛으로 변한 태양이 서서히 지고 있었다. 비석의 그림자가 황금빛 들판을 가로질러 길게 늘어졌다.
그녀는 비석 주위를 걸으며 넒은 들판을 응시했다. 들판은 반짝이는 주황빛 금색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불씨를 흩뿌리며 녹아내리는 금속판처럼도 보였다. 아치백 산악지대 너머로 저물어가는 태양의 단발마가 온 하늘을 불타는 주황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잠깐. 해는 저쪽에서 뜨잖아?
새하얀 유니콘의 뿔이 동쪽, 드라켄리지 산맥을 향했다. 일행은 드라켄리지 산맥으로부터 제법 먼 거리까지 왔으나, 아치백 산맥까지 남은 거리에 비하면 여전히 가까운 편이었다.
드라켄리지 산맥보다 더 동쪽에는 이퀘스트리아가 있고, 그곳에서 셀레스티아 공주가 끈기 있게 이 일몰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었다. 그 거대한 천체를 지평선 아래로 내려 보내어 낮을 끝내고, 여동생이 시작할 밤을 준비하기 위하여.
“같은 태양이잖아.” 래리티는 한결 편안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머라꼬?”
래리티는 애플잭을 바라보며, 방금 깨달은 온화한 경이에 대해 설명했다.
“지금 지고 있는 저 태양은.......이퀘스트리아에서 보던 거랑 같은 태양이지 않겠니? 어디에서나 같은 태양일 거고. 캔틀롯의 태양도, 이 곳의 태양도 모두 셀레스티아 공주님이 관리하시는 거잖아. 그렇지?”
애플잭은 래리티를 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어, 그건 글킨 헌데.......맞는 말이긴 하제.”
그녀는 일몰을 향해 몸을 돌렸다. 오렌지 색 털가죽이 환한 햇빛을 한 몸에 받아 더 밝게 반짝였다.
“내 말은.......태양이 두 개는 아니니께. 그제?”
그들은 잠자코 서 있었다. 들판에 부는 바람만이 침묵을 깨트렸다. 산만한 대시마저도 움직임을 멈춘 채였다.
“.......공주님께서 우릴 보고 계실까?”
푸른 페가수스의 장밋빛 눈동자가 태양을 곁눈질했다.
“그건 모르겠지만.......그래도, 공주님께서 여기 계신다는 느낌이 들어. 여기 뿐만 아니라, 태양빛이 닿는 모든 곳에.”
래리티는 앞발굽을 앞으로 쭉 뻗으며, 저물어가는 태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레인보우 대시는 입술을 옴싹달싹했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조금 후엔 날개를 접고 땅에 내려와 고개를 숙였다.
래리티의 반대편에 서 있던 애플잭은 고개 숙인 친구들을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그녀는 한동안 친구들과 태양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다가, 끝내 친구들과 보조를 맞췄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동안, 일행은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공주님께서도 우리가 시간을 낭비하길 바라진 않으실 거데이.”
제일 먼저 고개를 들고 일어선 건 애플잭이었다.
“내 말은, 우린 지금 공주님의 유일한 수제자를 도와야 되니까 말이제.”
일행은 모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커다란 석판을 뒤로한 채, 그들은 침묵 속에 다시 길을 떠났다.
-
오렌지색에서 붉은 색으로 변한 태양이 온 세상을 진홍색으로 물들였다. 하늘은 분홍빛을 띠었다가 붉은색으로 변했고 이내 보라색이 되었다. 그동안 일행은 계속해서 달렸다. 그들의 뒤에는 어느샌가 은백색의 달이 떠올라 있었다. 그 지배자인 루나 공주처럼,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조용한 모양새였다. 이윽고 땅거미가 지더니 별들도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선두를 달리던 어스 포니는 한밤중이 다 되어서야 발굽을 멈췄다.
“이제 슬슬 피곤하지 않나? 아무래도 더 가봐야 머물 만한 데를 못 찾을 것 같으니께, 그냥 여기서 야영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데이.”
래리티가 크게 하품을 하며 웅얼댔다.
“그거 차흐아아암........멋진 생각이야, 자기.”
새하얀 유니콘은 젖은 솜처럼 늘어져 있었다.
일행은 작은 언덕의 능선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래리티는 높게 자란 풀들로 만들어진 굴 같은 곳에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쌕쌕대는 부드러운 숨소리만 들려왔다.
애플잭은 그 앙증맞은 포니를 지켜보며 킬킬댔다.
“저 가스나, 저녁도 안 묵고 곯아떨어져 삤네. 엄청 힘들긴 했는 갑다.”
“인정할 건 해야겠지. 래리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 따라 와주고 있어.”
“매일 엄청 욕보고 있제.”
대시의 평에 동의하며, 애플잭은 풀 다발을 뽑아댔다.
“레인보우. 굵은 풀 좀 찾아봐라. 그런 게 더 잘 탈끼다.”
“불 붙이게?”
“니도 밤에 야생동물들하고 맞부딪히긴 싫을 거 아이가.”
애플잭은 뽑은 풀을 풀이 뽑혀 만들어진 공터에 수북이 쌓았다.
“야생동물이란 것들은 대체로 불을 싫어한데이.”
어느덧 공터엔 큰 풀 더미가 생겨났다. 애플잭은 안장 가방에서 통나무와 가는 막대기를 꺼내들고 풀 더미 가운데에 앉았다. 그리곤 가는 막대기를 통나무에 꽂고 발굽으로 빠르게 회전시켰다. 막대기의 끝부분이 통나무와 강력한 마찰을 일으켰다. 곧 통나무에서 연기가 나면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애플잭은 재빨리 그 연기 위에 풀들을 쌓았다. 마른 풀에 불이 붙자 타탁 대는 소리가 났다. 풀과 나무 타는 냄새가 야영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이 불이 오랫동안 붙어있진 않겠지만은.”
애플잭은 노련한 말투로 말했다.
“내가 이따가 오늘 밤에 일어나서 함 더 볼거니께 괜찮겄지. 이 정도 불이면 야생동물들 쫓는 용도로는 충분허고.”
한편 레인보우 대시는 풀을 뜯어먹느라 바빴다.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했지만, 적어도 식사 문제에 대해서는 애플잭이 했던 말들이 맞았다. 그녀는 드라켄리지 산맥을 통과할 때부터 이미 만년공복상태였다.
그래도 애플잭이 나한테까지 신경 쓰도록 하고 싶진 않아. 우린 이미 래리티를 신경 쓰는 것 만으로도 벅차잖아.
대시는 고양이처럼 웅크려 자고 있는 새하얀 유니콘을 곁눈질했다. 푸른 페가수스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진심으로, 그녀는 이 날 래리티가 보여준 모습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특히 자유와 책임에 대한 래리티의 이야기는 대시에게 경외심마저 일으켰다. 도대체 그 패션 중독자의 두뇌에 어떻게 그런 철학적인 생각들이 들어앉을 수 있었는지-
걔는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자유를 고를 거라고 했어.
대시는 래리티가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럼 합격이지, 뭐.
멍하니 불꽃을 쳐다보던 애플잭이 문득 입을 열었다.
“내가 니 뭔 생각하는지 함 맞춰보까?”
“그냥 래리티 생각하고 있었는데.”
애플잭은 눈을 음흉하게 뜬 채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아오, 그런 뜻이 아니라!”
발칵 짜증을 낸 대시는 다시 평온하게 말했다.
“그냥 내가 래리티랑 둘이 놀아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 그래. 한 번도.”
그녀는 불가로 걸어와 그 근처에 누웠다. 타오르는 불꽃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솔직히 난 트와일라잇이 우릴 모으기 전엔 래리티가 누군지도 몰랐었어. 지금은 같이 여행을 하고 있긴 하지만.”
대시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난 래리티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우리 모험에 함께 데려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순전히 그게 이유였지. 근데 걔는 내 생각보다.......응. 그랬어.”
“겉보기엔 영 까다로운 가스나처럼 굴지만서도, 래리티는 좋은 녀석이데이.”
애플잭이 말했다.
“참 서-윗한 가스나제.”
대시는 킥킥대며 웃었다.
“나랑 래리티가 둘이 시간을 보낸 적이 한 번 있긴 해. 그랜드 갤로핑 갈라에 입고 갈 드레스 준비할 때 말야. 걔가 우리 꺼 드레스 전부 다 만들어줬잖아. 난 그 때 걔한테 좀 짜증나게 굴었어. 그런데 걔는 기분 나쁜 티도 안내고, 내 요구사항은 다 들어줬어. 심지어 내가 말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내가 뭘 좋아할지 맞추더라니까.”
“맞다. 우리가 갸를 곤란하게 만든 적이 많았제. 근디 그 가스나는 그런 것들에 대해선 우리한테 한 번도 불평한 적 없었고.”
애플잭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그게 래리티가 일하는 방식이지 싶다. 불평불만은 많이 하는 것 같은디, 가만 들어보면 전부 다 소소한 것들 뿐이지 않나? 갈기, 옷, 혹은 흔한 대화 주제 같은 것들. 그 가스나는 오히려 진짜 부담스러운 것들에 대해선 불평 한 마디 안한데이. 진짜 문제가 생기지 전까지는 말이제. 갸는 지든 누구든 그 ‘부담스러운’ 것들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게 해주려고 그렇게 작고 소소한 불평들을 늘어놓는 것이제.”
“일종의 대응 전략 같은 건가? 래리티가 사전에 계획해놓은?”
“그걸 계획이라고 하긴 좀-”
그 때, 신음하듯 울부짖는 소리가 평원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물결처럼 울렁대며 길게 퍼지는 하울링이 두 포니의 몸에 소름이 올라오게 만들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경험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래리티는 그 와중에도 잠에 빠져 있었다.
“바, 방금 그거 뭐였노? 난생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데이!”
애플잭은 앞발굽을 몸 앞에 바싹 갖다 붙였다.
“제법 먼 데서 들린 것 같은데.” 레인보우 대시가 대답했다.
“어쨌든 들렸다 아이가, 가스나야. 다 들리는데 멀긴 뭐가 그래 멀겠노?”
애플잭이 대시의 낙관론을 즉각 반박하며 말을 이었다.
“레인보우. 함 날아갔다 와봐라.”
대시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백 피트 상공까지 날아오른 뒤, 그녀는 정지 비행을 하며 주변을 살폈다. 애플잭이 피운 불꽃은 한밤중의 평야가 자아내는 어둠 속에선 한없이 외롭고 빈약해보였다.
그럼에도 달빛이 있었기에, 대시가 야간 순찰 비행을 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흐음.......”
움직이는 물체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놓친 게 있을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아무것도 안 보여!”
대시는 아래쪽에 있는 애플잭에게 소리쳤다.
“가스나야! 올라간 김에 쫌만 더 살펴보래이!” 애플잭이 마주 외쳤다. “우리 쪽으로 달려오는 뭐 이상한 기 확실히 읎나?”
대시는 지평선을 다시 한 번 살폈다.
아치백 산악지대 방향. 문제없음. 왼쪽. 문제없음. 오른쪽. 문제없음. 드라켄리지 산맥 방향-
무언가가 보였다.
새하얀 빛줄기가 산꼭대기에서부터 산비탈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그것은 평원을 강타하고 계속해서 불규칙적인 궤적을 남기며 이동했다. 대시가 눈을 한 번 더 깜빡였을 때 그 빛줄기는 그녀의 시선을 벗어났고, 얼마 안가 완전히 사라졌다.
<새하얀 빛줄기가 산꼭대기에서부터 산비탈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그것은 평원을 강타하고 계속해서 불규칙적인 궤적을 남기며 이동했다.>
“레인보우! 뭣 좀 보이나?”
대시는 몸을 흔들며 정신을 되찾았다. 그녀는 능숙하게 고도를 낮추고 지면에 발굽을 디뎠다.
“.......아니. 아무것도.”
“그랬나? 그럼 내는 이제 불에 풀떼기 좀 더 넣아야긋다.”
애플잭이 부쩍 신중해진 투로 말했다.
“그럼 사나운 야생동물들도 생각을 좀 바꿀 수도 있겄제. 난 그 다음에 자야겠데이.”
“그래.”
대시는 노곤한 듯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이제 슬슬 졸리네. 자야겠어. 잘 자. AJ.”
“니도 잘 자라, 레인보우.” 애플잭은 큰 풀들 사이로 들어가며 대답했다.
대시는 몸을 웅크리고 머리를 기댔다. 키가 큰 풀들이 꺾이고 접히면서 자연 쿠션 같은 역할을 했다. 제법 안락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레인보우 대시는 그 안락함을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 봤던 장면들 탓에 마음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그 궤적.......빛줄기.......그거 번개 였던 것 같은데. 그래서 어쩌라고? 땅에 번개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야?
이 날 하루 동안 겪었던 여러 분투의 결과로, 그녀는 더 이상 상념을 이어갈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다.
푸른 페가수스는 곧 잠이 들었다.
그 날 밤, 그녀는 잡지 못할 파란 꼬리를 쫓아 천둥 번개로 가득한 밤하늘을 비행하는 꿈을 꾸었다. 여행을 떠난 지 3일 만에 두 번째로 꾸는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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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7.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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