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8.
Written by. Jetfire2012
Translated by. BlackS
이 날 아침엔 래리티가 제일 먼저 눈을 떴다. 새벽의 첫 빛에 눈꺼풀이 간지러워진 탓이었다.
그녀는 입을 크게 벌리며 하품을 했다. 이어서 기지개도 켜려했지만, 뒷다리에 무언가가 걸리는 게 있었다. 둔부로 시선을 돌려보니, 빵빵한 안장 가방 두 개가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런, 멍청한 래리티. 내 정신 좀 봐.
새하얀 발굽이 가방의 고정끈을 풀었다. 지난 밤 내내 짓눌려있던 뒷다리에서 경련이 조금 일어났다.
래리티는 풀숲 사이를 흘깃 쳐다보았다. 탄 자국이 남아있는 화구를 중심으로, 애플잭과 레인보우 대시가 자고 있었다. 푸른 페가수스는 등을 돌리고 누워있었고, 오렌지 색 어스포니는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부드럽게 코를 골고 있었다.
후자의 자는 얼굴을 쳐다보던 래리티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잘 때만이라도 푹 쉬렴, 애플잭. 늘 고생하는 거 알고 있단다.
래리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간밤에 흥미로운 꿈을 꿨다. 패션쇼와 나이트메어 문에 대한 꿈이었다.
내가 어쩌다 여행 중에 이런 꿈을 꾸게 된 걸까? 아마도 갑작스런 풍경의 변화 때문이겠지. 이전과는 극적으로 달라진 풍경들이 내 상상력을 자극한 걸 거야.
배에서 꼬르륵대는 소리가 났다.
.......내 식욕도 자극한 모양이고.
래리티는 안장 가방을 다시 맨 뒤, 높이 자란 풀들 사이를 헤쳐 나갔다. 중간에 시험 삼아 풀 끄트머리 부분을 조금 먹어보기도 했다.
그러다 어떤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새하얀 발굽이 걸음을 멈췄다.
혹시 저 쪽에.......
그녀는 향기를 좇아 풀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향기가 가까워질수록 풀들은 점점 커졌다. 언제부턴가 풀들 사이에 부들개지가 보이기 시작했고, 지면도 점점 물러져갔다.
커튼처럼 드리워진 풀들을 걷어낸 순간, 래리티는 냄새의 근원지 : 작은 연못을 발견했다. 키 큰 풀들 가운데에 외로이, 평온하게 존재하는 연못이었다. 연못으로 흘러드는 개울은 보이지 않았다. 봄비로 인해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게 분명했다.
래리티는 연못가에 무릎을 꿇고 코를 킁킁댔다.
깨끗한 물이구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요즘 목욕을 통 못했지!
따뜻한 목욕물도, 라벤더 향 입욕제도 없었다. 하지만 비 맞은 듯 땀을 흘렸던 게 고작 하루 전의 일이었다. 게다가 애플잭이라면 분명히 시간낭비라며 허락해주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애플잭은 지금 자고 있잖아!
새하얀 유니콘은 안장 가방을 벗어던지고 연못에 뛰어들었다. 물은 구절(말굽 바로 윗부분 뒤쪽 돌기) 중간 즈음까지 올라왔다. 그녀는 쪼그리고 앉아 앞발굽으로 몸을 닦았다. 깨끗한 물로 털가죽을 헹구는 느낌이 여간 기분 좋은 게 아니었다. 탁 트인 들판의 새벽은 약간 쌀쌀했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태양이 지면을 데워준 덕에 불쾌할 정도로 춥지는 않았다.
래리티는 부드럽게 흥얼대기 시작했다. 희미하던 흥얼거림은 그녀가 목욕을 만끽할수록 선명해졌다. 그리고 보랏빛 갈기가 물에 잠겼을 무렵엔 완연한 노래로 변했다.
The road goes ever on and on,
내 길은 끝없이 이어진다네
Down from the door where it began
문 앞에서 시작된 내 길
Now far ahead the road has gone.
이제 길은 저 멀리 사라졌지만
And I must follow if I can.
내 길은 계속 걸어 나가야 하리라
래리티가 계속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 소년 농군 같은 목소리가 다음 구절을 받았다.
Pursuing it with eager hooves
지친 발굽으로 나아간다네
until it joins some larger way
언젠가 더 큰 길에 들어설 때까지
where from many paths i will choose
내가 걸어갈 수많은 길들 중에서
one that will lead me home someday
하나쯤은 날 집으로 데려다 주겠지
“좋은 아침이야, 자기!”
래리티는 답가를 불러준 포니에게 발굽을 흔들었다.
“물이 좋은데, 들어와 볼래?”
<“물이 좋은데, 들어와 볼래?”>
“고맙지만, 낸 됐데이.”
연못가에 서 있던 애플잭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녀의 입술 사이엔, 빅 매킨토시가 으레 그러듯 작은 풀잎이 물려있었다.
“그나저나 내는 니가 그 노래를 알 줄은 몰랐는디.”
“애플잭. 난 학교 다닐 때부터 이 노래를 알고 있었단다. 놀이터에서 놀던 숫망아지들이 자주 불렀거든. 이 노래 모르는 포니 찾기가 더 힘들 걸?”
“아, 맞나.”
애플잭은 담백하게 반응했다.
“그건 글코 이제 목욕 다 했제? 슬슬 나오래이. 내는 레인보우 좀 깨우고 올거니께. 그러고 나면 바로 출발할끼다.”
“그래. 그렇겠지.”
이런 예상은 좀 틀렸으면 했는데.
래리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 밖으로 나온 래리티는 갈기와 꼬리를 있는 힘껏 흔들어 물기를 털어냈다. 타올이 없었던 관계로, 남은 물기는 자연 건조 방식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안장 가방을 다시 맨 뒤 오른쪽 가방에서 빗을 꺼냈다. 그리곤 야영지로 돌아가는 내내 갈기를 빗어댔다.
래리티가 야영지에 도착했을 때, 레인보우 대시는 이미 깨어나 있었다. 그녀는 주변에 있는 풀잎들을 힘차게 뜯어 먹고 있었다.
“여, 굿모닝.” 대시가 풀잎을 질겅질겅 씹으며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야. 레인보우 대시.”
래리티가 대답했다. 그녀는 꽤 상쾌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지난밤의 숙면에 이어 깨끗한 물로 목욕까지 한 참이라,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젯밤에 너희 둘을 내버려두고 먼저 잠들어버려서 정말로 미안하구나. 너무 피곤했거든.”
“괜찮아, 래리티.”
대시는 시치미를 뚝 떼고 대답했다.
“.......특별한 일도 없었고.”
지난밤에 들었던 괴성에 대해서는 래리티에게 이야기하지 말 것 : 이는 대시와 애플잭이 어젯밤에 미리 상의해 결정한 내용이었다.
“그. 그건 그렇고.”
대시는 다시 풀을 뜯어먹는데 집중하며 화제를 돌렸다.
“어제 잘 잤다는 건, 오늘은 더 많이 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겠지!”
래리티는 얼굴을 찌푸렸다.
“어제처럼 또 그렇게 죽을 듯이.......뛰어야 한다는 거니?”
“아마.......도?” 대시는 애매하게 중얼거렸다. “아마.......난 오늘은 날아야 할 거야. 누군가는, 그, 주변에 뭐가 있는지 경계해야 하지 않겠어?”
“주변을 경계하려고 굳이 날아야 할 것 같진 않은데. 여기 주변은 다 평탄한 지형이잖아.”
“더 멀리 본다고 나쁠 건 없겠지. 특히 뭔가가 다가오고 있다면 말야!”
저 가스나는 경주할 땐 속임수 잘 쓰면서, 왜 정작 멍석 깔아주면 저래 몬하노!
애플잭은 뜨악한 얼굴로 대시에게 눈짓을 보냈다.
“뭔가, 라고?” 래리티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 뭔가가 뭔데?”
푸른 페가수스는 다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그, 왜 있잖아! 길드데일의 포니들 말이야! 이방인들을 두려워하는 그 포니 친구들을 놀래 키고 싶진 않잖아, 그치?”
“.......”
래리티는 긴 속눈썹을 깜빡대며 잠시 고민했다. 그러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 그렇다면야.”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라는 속마음은 숨긴 채, 래리티는 갈기를 마저 빗질하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내가 하라 마라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그래도 공중에서 주변 감시를 하는 건 좋은 생각인 것 같구나.”
“그래도, 쩝쩝. 지금부터, 음냠냠, 날진 않을 거야. 출발한 다음에 날거야.”
레인보우 대시는 입에 물고 있던 풀을 우적우적 씹으며 말했다. 래리티는 오늘 아침 대시의 입 안에 풀이 없었던 적이 있었는지에 대해 고찰했다.
“내는 아침 식사 끝났데이.”
애플잭이 안장 가방의 끈을 조이며 말했다.
“래리티, 니는 어떻노? 준비 다 됐나?”
“잠시만.”
멋쟁이 유니콘은 안장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들었다.
“흐으으으으........음.”
보랏빛 갈기가 약간 다듬어지지 않은 듯 보였다. 하지만 현재 상황을 감안해서 본다면 꽤 멋져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좋아, 이제 가자!”
일행은 태양을 등지며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래리티는 기분이 좋았다. 이날따라 애플잭과 레인보우 대시의 페이스에 맞추는 것이 어렵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젯밤에 잠을 잘 자서 그런가? 아니면 그냥 근육이 생겨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
고상하던 얼굴이 벌레라도 씹은 것 마냥 찌푸려졌다.
벌크 바이셉스 같은 꼴이 되면 안 돼. 제발. 절대 안 돼.
물론 그녀도 운동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날씬한 몸매는 주 3회의 심폐 지구력 강화 운동의 성과였다. 다만 그녀는 레인보우 대시의 마르고 각진 몸매는 물론이요 애플잭의 튼실한 다리 근육도 원하지 않았다.
어머,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장거리 달리기 만으로는 거대한 근육을 얻을 수 없다 : 이는 운동에 조금이라도 발굽을 담가본 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인내심이 좋아진 걸까?
이유야 어찌됐든, 래리티는 자신이 지금까지 나가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하지만 근육통이란 건, 운동을 한 직후 보다 그 다음날에 더 심하게 오지 않던가?
제기랄.
혀를 차던 래리티는 자신의 그림자 주위를 빙빙 도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하늘을 향했다.
독수리인가?
새처럼 생긴, 아름답고 어두운 빛깔의 무언가가 보였다. 그것은 어떤 창조적인 패션 포니가 새 드레스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점심 식사 시간에 이걸 스케치로 남겨야 해. 꼭 기억하자........그나저나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딴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어쩐지 시간을 빨리 가는 것 같아.
드넓은 들판을 뒤로하고, 일행은 계속해서 달렸다. 어느샌가부터 풀들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바람 때문일수도, 혹은 발굽이나 무언가에 밟혔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드높던 풀의 키가 어느새 구절의 중간 즈음까지 낮아졌다.
그 때까지도 문명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산 중턱에서 처음으로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길드데일의 황금 평원은 여전히 거칠고 길들여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전날 보았던 석판은 그저 경계선의 표시였던걸까? 어쩌면 길드데일 포니들은 자국 동쪽엔 살지 않을 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으면 방랑 포니라는 그들이 이퀘스트리아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았다.
태양은 일행의 이동 속도를 조롱하듯 빠른 속도로 하늘을 건넜다. 레인보우 대시는 하늘을 흘깃 올려다보았다. 벌써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건 안 좋은데. 지금쯤이면 좀 더 많이 가 있었어야 해.
이 날, 그녀와 애플잭은 경주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컨디션에 맞게 편안하게 달렸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페가수스 레인보우 대시가 이 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걱정하던 것이기도 했다 : 유니콘이나 어스 포니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페가수스의 비행 속도에는 절대 미치지 못한다.
레인보우 대시는 그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서로 페이스를 맞추느라 낭비된 시간이 얼마나 될지를 점쳐보며 쓸데없이 짜증을 내는 것 말고는.
앞으로도 매일 이 속도대로 간다치면, 아치백 산악지대까지 며칠이면 갈 수 있을까?
수학에 문외한인 레인보우 대시로서는 도저히 계산해낼 수 없는 문제였다. 다만 그녀의 바람보다는 오래 걸릴 것이 분명했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뿔 부패증에 걸린 지 닷새 째였다. 이제 기한까진 9일이 남아있었다. 일행에겐 행운이 필요했다.
명심해. 5일이야. 만약 기한까지 5일 남기고도 영 가망 없겠다 싶으면, 난 혼자 아치백 산악지대로 가는 거야.
레인보우 대시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혼자서 가는 거야.
조급해진 페가수스는 저도 모르게 속도를 올렸다. 그녀는 이 일을 꼭 완수해내고 싶었고, 동시에 친구들을 뒤에 두고 가고 싶지도 않았다. 애플잭과 래리티에게 함께 여행을 완수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레인보우 대시는 그들이 해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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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정오까지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무성하던 풀밭은 이제 키 작은 잔디밭이 되어 있었다. 일행은 거친 황금빛 풀 쪼가리들로나마 배를 채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애플잭은 친구들과 떨어져 북쪽으로 향하며 풀을 뜯어먹었다. 그러다 풀이 아닌 무언가 : 솜털 같고 가느다란 물체가 이에 씹혔다. 아래쪽을 더 자세히 살펴보니, 짧은 줄기가 풀숲에서 가늘게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 역시 황금색이긴 했지만, 주변의 다른 풀들보다 조금 더 갈색 빛이 돌았다.
애플잭은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 닿는 곳 어디에나 그것들이 있었다. 그것들 대부분은 여타 풀들보다 키도 더 컸다.
그것은.......
“하이고마, 이, 이거 밀 아이가! 밀이다! 밀!”
< “하이고마, 이, 이거 밀 아이가! 밀이다! 밀!”>
오렌지 색 어스 포니는 환호성을 터트렸다. 완만한 평지의 잔디밭 가운데에 크게 자란 밀들의 군락지가, 아니, 밀밭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지금껏 몇 번 봐왔던 거친 야생의 밀이 아닌, 진짜 밀이었다. 천성 농사꾼인 그녀가 보기에, 우연한 바람만으로 이렇게 많은 밀이 모이기란 불가능했다.
이건 포니가 심은 게 틀림 없데이!
“어이! 다들 좀 들어봐라!”
애플잭은 친구들에게 달려가며 외쳤다.
“가스나들아! 여 와서 이것 좀 봐라!”
래리티와 레인보우 대시는 언덕 사이의 골에 있었다. 그 바람에 애플잭은 친구들을 쉽게 찾지 못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언덕은 낮았고 골도 얕았다. 그녀는 친구들의 실루엣을 발견하고는 신나게 발굽을 굴렸다. 래리티와 대시는 애플잭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마, 니들, 내가 뭘 찾았는지 알믄-”
본래 애플잭은 -깜짝 놀라 나자빠질끼다, 라는 말을 이어 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희열로 두근대는 심장박동 사이로 또 다른 진동이 느껴진 탓이었다. 그녀는 예정을 바꿔 다른 말을 이어 붙였다.
“-니들, 지금 이거 느껴지나?”
그녀가 그렇게 말한 시점에서, 진동의 세기는 이미 ‘느껴짐’을 넘어선 상태였다.
“어.......들리는데?”
레인보우 대시가 귀를 쫑긋댔다.
“뭐야, 무슨 일인데?” 패닉에 빠진 래리티는 사방을 흘깃거렸다. “설마 지진?”
“레인보우. 날아서 좀 봐바라.”
애플잭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전날 밤 들었던 괴성의 주인이 나타날 가능성을 염려하고 있었다.
푸른 페가수스는 쏜살같이 날아올랐다. 래리티와 애플잭은 그녀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방을 살피는 것을 지켜보았다. 남쪽, 서쪽, 북쪽.......거기서 페가수스는 날갯짓을 주춤대며 뒤로 물러났다.
대시는 급하게 지면으로 방향을 돌렸다. 하강 속도가 너무 빨랐던 나머지 래리티는 대시가 추락하려는 줄로만 알고 뒤로 물러났다.
물론, 래리티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시는 능숙하게 날개를 치며 지면에 발굽을 디뎠다. 하지만 평소보다 착륙 방식이 거칠었고, 장밋빛 눈동자는 크게 뜨여 있었다.
“뭔가 있었니?”
“무슨 일이고? 니 괘안나? 도대체 뭘 봤길래 그라노?”
레인보우 대시는 두어 번 심호흡을 내뱉고 단숨에 말했다.
“포니들!”
“머라꼬?” 놀란 애플잭이 성을 내듯 되물었다.
그러나 대시가 다시 대답해줄 필요는 없었다. 웅웅거리던 소리는 이제 대기를 가르는 천둥처럼 극적으로 명확해져 있었다. 그것은 발굽소리, 적지 않은 수의 포니들이 달리면서 내는 발굽소리였다.
일행은 소리가 들려오는 북쪽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우뚝 솟아있는 야트막한 언덕이 보였다. 불과 몇 초 후, 그 언덕 위로 가늘고 긴 형체가 불쑥 나타났다. 그걸 시작으로 수많은 포니들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힘차게 언덕을 넘어 풀밭을 내달렸다.
포니다!
규칙적이면서도 폭발적인 어스 포니들의 돌진이 줄이어 언덕을 넘었다. 그들의 집단은 포니 다섯 기가 한 줄에 배치된 질서정연하고 정돈된 모습이었는데, 세 포니가 집단의 바로 앞에서 선두를 이끌고 있었다. 그 세 포니들보다 포니 몸길이만큼 더 앞쪽엔 두 포니가 발굽을 나란히 하고 달리고 있었다. 그 둘은 각각 검붉은 빛과 흐린 구름 빛의 털색을 가지고 있었다.
새삼스럽지만, 거대한 무리였다. 마지막으로 언덕을 넘은 줄까지 합치면 적어도 백여 기는 될 것 같았다. 일개 여행객인 세 포니들은 슬슬 상황의 무게를 실감하기 시작했다.
“지, 진정하그래이. 가스나들아.” 애플잭이 말했다. “뭔가 사단을 낼려고 하는 건 아닐끼다.”
“저 분들, 창을 들고 있는 것 같은데, 애플잭?”
래리티가 걱정스레 대꾸했다.
애플잭은 상대 무리를 쳐다보았다. 래리티의 말대로, 무리의 모든 구성원들의 둔부에는 길고 튼튼해 보이는 창이 끈으로 묶여 있었다. 그들의 진격은 가느다란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돌진해오는 무리를 응시하던 애플잭은 또 다른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모두 붉은 실과 금 줄무늬가 수놓아진 검붉은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 갑옷은 머리부터 목, 둔부까지 모두 감싸고 있었고, 아래쪽 다리에는 정강이 보호대도 착용하고 있었다. 둔부를 감싸고 있는 갑옷 부위엔 일전에 일행이 석판에서 봤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우리한테 달려오고 있잖아!” 대시가 소리쳤다.
“저 분들이 우리를 봤을까?”
래리티는 현실도피성이 다분한 물음을 던졌다.
집단의 선봉엔 검붉은 포니와 흐린구름색 포니가 달리고 있었다. 그들이 속도를 늦추자, 무리는 바위를 만난 강처럼 부드 럽게 갈라졌다. 갈라진 줄기는 이퀘스트리아의 세 포니들을 중심에 두고 다시 만났다. 그들은 포위망을 좁히며 속도를 줄였다.
이윽고 집단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이는 일행에게 그다지 위로가 되는 소식은 아니었다. 애초에, 완전 무장한 낯선 포 니들로 이루어진 두 겹의 포위망에 갇힌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소식은 달리 없을 것이었다.
그 때, 포위망이 조금 열렸다. 그 사이로 검붉은 포니와 흐린구름색 포니가 들어섰다. 검붉은 포니는 숫말이었고, 일행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그의 눈동자는 깊은 푸른색이었고, 갈기와 꼬리는 검은 줄이 그어진 연회색이었다. 흐린구름색 포니는 암말이었는데, 그녀의 갈기와 꼬리는 흰색이었고 눈동자는 초록색이었다.
래리티는 주위에 모여든 포니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들의 털색은 모두 천연색에 중립적인 채도와 명도를 갖고 있었다. 갈색, 흰색, 회색, 검은색, 오렌지색과 붉은색이 그나마 가장 선명해 보이는 색이었고, 그마저도 명도가 높아보이진 않 았다. 핑크색이나 노란색, 파란색, 초록색 등 이퀘스트리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털색을 가진 포니는 한 마리도 없었다. 래리티는 포니들의 모임에 익숙한 편이었지만, 이렇듯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모임에 참석해본 적은 없었다.
이 분들이 무장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야. 그건 아무 상관도 없어.
래리티는 침을 꼴깍 삼키며 되뇌었다. 정말로.
검붉은 색 숫말과 흐린구름색 암말은 일행의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이 때까지도 래리티는 주변을 세세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는 숫말의 투구 가운데, 즉 귀 사이에 문장이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문장은 나침반처럼 네 방향이 표시되어 있는 황금색 원이었는데, 그 위에는 오른쪽을 가리키는 은색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래리티는 이 숫말이 집단의 지도자임을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이퀘스트리아의 유니콘, 페가수스, 어스 포니여.”
숫말이 말했다. 약간 억양이 있지만 날카롭고 선명한 목소리였다.
“길드데일엔 무슨 볼일로 왔지?”
제일 먼저 마음을 다잡은 건 래리티였다.
“어-흠, 초면인 포니들끼리 만날 땐, 일반적으로 더 예의바른 쪽이 먼저 자기소개를 한답니다.”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유니콘. 이 만남은 예의를 차릴 만한 가치가 있는 자리가 아니다.”
검붉은 색 숫말은 더 날선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 온 목적이 뭐냐? 어서 밝혀라!”
레인보우 대시가 코웃음을 치며 앞으로 나섰다.
“야, 얼간아. 이름 정도는 그냥 좀 알려주면 안 되냐? 그럼 나도 내 이름을 말해주지. 다른 것도 더 말해줄 수도 있고. 다 니들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린 일이지만.”
그러자 숫말의 옆에 있던 흐린구름색 암말이 입을 열었다.
“.......태도가 아주 개판이군, 페가수스.”
< “.......태도가 아주 개판이군, 페가수스.”>
“아하, 그러셔요?” 대시가 빈정대며 받아쳤다. “그래서, 어쩔 건데?”
흐린구름색 어스포니는 무릎을 굽히더니 머리를 옆구리로 잽싸게 돌렸다. 다음 순간, 대시의 눈앞에 철로 된 창날이 진동하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푸른 페가수스는 경악하며 뒤로 물러섰다. 창을 물고 있는 흐린구름색 포니가 한 눈에 들어왔다.
경악에 이어 찾아온 감정은 분노였다. 대시는 날개를 파닥대며 지면에서 몸을 띄워올렸다. 그녀가 큰 원 모양을 그리며 날개를 쳐대자, 사납게 돌변한 바람이 길드데일 포니들에게 불어 닥쳤다.
“그만! 그만 두래이!”
애플잭이 양 진영 사이에 끼어들며 소리쳤다. 그녀는 그 자리에 짐짓 느긋하게 앉더니, 한 발굽으론 대시를 지면에 끌어내렸고 다른 발굽으로는 흐린구름색 포니의 창날을 낮췄다.
“우리가 이래 티격태격댈 하등의 이유가 없심더. 다 같은 포니 아입니까? 예?”
애플잭은 두 길드데일 포니들을 바라보며 웃어보였다. 광대뼈를 밀어올린 입꼬리가 미세하게 씰룩거렸다.
“자기소개 참 좋지예. 여러분네 땅에 손님으로 온 입장이니, 저희 먼저 하겠심더. 지는 애플잭이라카고,”
애플잭은 발굽으로 푸른 페가수스를 가리키고, “여기 이 가스나는 레인보우 대시라고 합니데이.”
다른 발굽으로는 새하얀 유니콘을 가리켰다. “저 가스나는 래리티고예. 여러분들이 예상하신 대로, 즈인 이퀘스트리아에서 왔습니데이. 더 정확히 말하자믄 포니빌에서지예. 포니빌은 저 산 건너편에 있심더.”
애플잭은 발굽으로 동쪽을 가리켰다.
검붉은 색 어스포니는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내, 험악하던 낯빛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딱히 문제될 소지는 없어 보이는군.”
숫말은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길드데일 경비대의 대장이자 동부 구역의 원수Marshal Of Eastern Quater, 애쉬테일Ashtail이라 한다. 이쪽은 쉴드 메이든Shield Maiden. 내 부관이지.”
애쉬테일은 흐린구름색 암말에게 고갯짓을 했다. 쉴드 메이든은 세 이퀘스트리아 포니들을 째려보면서도, 창을 거두고 고정끈에 걸었다.
애쉬테일은 일행에게 고갯짓을 했다.
“이제 그대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군.”
“우리는 임무를 수행 중이야!” 레인보우 대시가 대답했다.
“임무?” 애쉬테일이 되물었다.
“저희는 한 포니의 목숨이 달린 중요한 여행을 하고 있답니다.”
래리티가 부연설명을 했다.
“포니빌에 있는 저희 친구들 중 하나가 굉장히 아프거든요. 그런데 기한 내에 그 친구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초가 아치백 산악지대에서만 자란다는군요. 즉, 저희는 여러분의 왕국을 지나가야 한다는 거지요.”
말을 마친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두 눈을 애교스럽게 깜빡였다.
이 이상 미마계(美馬計)를 쓸 순 없어.
이는 그녀 나름대로의 치밀한 계산의 결과였다.
더 했다간 이 음침해 보이는 포니가 짜증을 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래리티의 얄팍한 수싸움으론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애쉬테일은 눈썹을 찌푸렸다.
“이퀘스트리아 포니들이 길드데일을 통과한다는 말은 못 들어봤다만.”
“좀 급하게 준비된 여정이라서예.” 애플잭이 변명하듯 말했다.
“그건 우리의 고려사항이 아니다.” 검붉은 포니는 즉각 대답을 내놓았다.
“우리의 동의 없이는 그 어떤 이퀘스트리아 포니도 이 대지를 지나갈 수 없다. 우린 그대들의 여정에 대해서 전해들은 바가 없다. 프롱혼Pronghorn이 우리에게 보내졌어야 마땅할 것이다.”
“프 뭐?” 레인보우 대시가 물었다.
애쉬테일은 거칠게 콧김을 내뿜었다.
“전서(傳書)가 먼저 보내졌어야 마땅할 것이다. 너희 지도자로부터 우리 측으로. 전서없는 입국은 모두 불법이며, 불법 침입자는 길드데일에서 단호히 배제될 것이다.”
“불법 침입이라니 말도 안 된다 아입니까!”
애플잭이 역설했다.
“즈인 그냥 아치백 산악지대로 가고 싶을 뿐입니데이. 거기 있는 약초가, 친구한테 그기 꼭 필요합니데이!”
“설령 그대 말이 사실이래도, 내 입장에서는 그 말을 쉽게 믿어줄 수가 없다.”
애쉬테일이 말했다.
“길드데일 군주의 허가를 득하지 못한 이퀘스트리아 포니는 길드데일에 들어올 수 없다.”
경비대장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만약 허가를 받았다 치더라도, 그대들 셋 중 둘은 어떤 상황에서도 길드데일에 들어올 수 없다. 페가수스와 유니콘. 그대들은 환영 받지 못한다.”
“뭐엇?!”
“어머, 그래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래리티는 전에 없이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유니콘 뿔에 엉덩이라도 찔려본 적 있다면 말이에요! 흥!”
“우리에겐 그대들의 마법 따위는 필요치 않다. 무엇보다도,”
애쉬테일은 이가 드러날 정도로 얼굴을 찡그리며 으르렁댔다.
“길드데일엔 어스 포니들에게 내재된 마법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 이상은 쓸모없지. 자연의 질서를 함부로 조작하는 거만한 페가수스들의 마법이나, 특히 눈속임에 불과한 교활한 유니콘들의-”
“뭐, 뭐라고요?! 눈속임? 교활?! 어쩜 그런 망발을!”
새하얀 유니콘의 눈동자에서 푸른 불똥이 튀었다.
“당신들 지금 말 다했어?!?!”
<"당신들 지금 말 다했어?!?!">
래리티는 조금 전의 대시보다도 크게 소리쳤다. 그 서슬에 성벽처럼 우뚝 서있던 애쉬테일과 쉴드 메이든마저 뒤로 물러섰다. 포위망을 이루던 길드데일 포니들 중 몇몇은 목을 뒤로 빼거나 창을 다잡았고, 그렇지 않은 자들도 모두 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어.......엣헴.”
뒤늦게 이성을 되찾은 래리티는 부자연스럽게 이를 드러냈다.
“에, 헤, 헤.......세상에. 엣헴, 그래요. 저도 유니콘인지라, 그런 말을 들으니 갑자기 화가 나서 그만.......호호. 어쨌든 우리 마법은 눈속임이 아니에요. 교활.......한 유니콘도 있겠지만 안 그런 유니콘도 많답니다. 어쨌든 걱정 말아요. 이제 괜찮으니까.”
애쉬테일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물론, 직전에 하던 말을 그대로 이어가진 않았다.
“.......유니콘들과 페가수스들의 마법은 우리 왕국과 우리의 삶의 방식을 위협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불허했지. 이건 태양 여왕Sun Queen과 맺었던 조약 중 일부였다.”
“셀레스티아 공주님을 말씀하시는 거지예?” 애플잭이 물었다.
“하지만 저희가 읽은 바로는, 이퀘스트리아와 길드데일은 우정의 조약을 맺었다고 하던걸요.”
“그건 충성을 맹세하는 일방적인 조약이었지. 그대가 말하는 상호 평등한 우정의 조약이 아니라.”
애쉬테일은 평온한 어조로 래리티의 표현을 정정했다.
“그 조약은 약 백 년 전쯤에 수정되었다. 당시 태양 여왕은 드라켄리지 산맥을 이퀘스트리아 영토로 편입하고 싶어 했지. 우리는 여왕의 마법적 의미에서의 후손들 중 두 부류, 페가수스와 유니콘을 길드데일에서 추방하겠다는 조건으로 동의했다. 여왕도 동의했지. 물론 우리는 여왕이 매일 태양을 띄워주는 것에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우리가 여왕의 나라와 그 마법에 바라는 건 딱 거기까지다.”
“페가소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대시는 못내 억울해했다. 그 옆에 서있던 래리티의 눈빛이 다시 이글거렸다.
얘는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까? 또 페가소스래, 소스, 소스, 소스! 건초 프라이에나 뿌려먹으라지, 그 빌어먹을 소스!
그러나 래리티는 입을 앙다물었다. 조금 전 휘둘렀던 히스테리의 후폭풍이 이제 겨우 잠잠해진 참이 아닌가?
“나라마다 각자 사정이 있는 법이지.”
애쉬테일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대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다급하게 물었다.
“니들 그럼 비는 어떻게 내려? 눈은? 바람은?”
“우리는 그저 자연이 주는 대로 받는다. 누리기도 하고, 견뎌내기도 하지.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누리는 자유인 것이다. 좋으냐 나쁘냐, 도움이 되냐 안 되냐는 그 다음 문제지.”
대답을 마친 애쉬테일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논쟁으로 시간을 무의미하게 낭비하고 싶진 않군! 어쨌든 그대들은 더 이상 갈 수 없다. 우리가 그대들을 구속하기 전에 당장 발굽을 돌려라.”
냉정을 유지하던 애플잭은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즈이는! 서쪽이 아니면! 어데로도 안 갈 겁니데이!”
그녀는 으르렁대며 한 발굽 앞으로 나섰다.
“즈이 친구헌티 그 약초가 꼭 필요하다 안캅니까! 그게 없으면 갸는 죽을 겁니데이!”
“그대는 그걸 증명할 방법이 없다.”
“저흰 스파이크의 불꽃을 갖고 있어요!”
래리티는 마법을 이용해 안장 가방에서 초록 불꽃이 담긴 병을 꺼내들었다. 그녀는 애쉬테일의 눈이 휘둥그레 하게 떠진 것을 보았다. 분명 이 어스 포니는 유니콘의 마법에 익숙치않은 것이리라.
“이 불꽃은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직속 가신인 드래곤이 저희에게 준 거랍니다. 이 불꽃으로 태운 물건은 이 불꽃을 뿜은 드래곤에게 곧바로 전달되지요. 저희가 이걸 왜 갖고 있겠어요? 그래요. 저흰 거짓말쟁이가 아니랍니다. 그냥 약초가 꼭 필요할 뿐이에요.”
애쉬테일의 시선이 병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불꽃을 따라 움직였다. 그는 작위적으로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씹어뱉듯 말했다.
“어쩌면.......그게 그대들의 결백을 증명해줄 수도 있겠지.”
그러나 파란 눈동자엔 다시 한 번 냉정한 빛이 어렸다.
“또한 그대들이 사악한 속내를 숨기고 있을 가능성도 보여주는군. 길드데일 내부에선 서로 서신을 자주 주고받는 편이 아니다만, 각 구역 간의 일을 처리할 땐 또 다르지. 특히 경비대에 대한 정보는 서로 자주 주고받는다. 종이쪼가리 몇 장에 왕국 전체를 순환하는 경비대의 배치 일정이 낱낱이 담겨있지. 그리고 그대들의 말에 의하면, 그대들은 온갖 정보를 곧장 태양 여왕에게 보낼 수 있는 불꽃을 갖고 있군. 침략에 앞선 정탐에 아주 적절한 장비가 아닌가? 그대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심금을 울려 진실을 감추기 위한 연막일 테고.”
“머, 머라꼬예?”
몇 년 전 부모님을 잃은 이래로, 애플잭은 이토록 큰 분노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고통 끝에 죽음을 맞이하는 라벤더 색 유니콘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트와일라잇이! 이 놈팽이 때문에!
한 번 불 붙은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내는 언제나 정직하게 살아왔단 말이데이!
“마! 적당히 쫌 해라! 이기 벌써 몇 번째고! 우리는, 거짓말쟁이가, 아이다!”
애플잭은 거칠고 우렁찬 목소리로 일갈했다.
“니들도 참 징허다 징해! 어째 그래 한결같이 우리가 거짓말쟁이일거라 생각할 수가 있노?! 이건 죽냐 사냐 가 걸린 문제다 안카나! 인자 됐다! 둘 중에 골라라! 우리 앞길에서 꺼지거나 창을 내리고 꺼지거나!”
애플잭은 콧김을 내뿜으며 한 발굽 내딛었다. 애쉬테일은 반사적으로 몇 발굽 뒤로 물러섰다. 레인보우 대시와 래리티도 길드데일 포니들과 같은 수준으로 충격을 받았다. 다만 래리티와 달리 레인보우 대시는 애플잭의 분노에 편승했다. 다시 하늘로 날아오른 그녀는 조금 전처럼 원 모양을 그리며 날개를 쳐댔다. 모여 있던 포니들의 갈기가 세차게 흔들렸다.
두 번째 대치 상태를 진정시킨 것은 놀랍게도 애쉬테일이었다.
“부디 진정하라.”
차가운 도발을 흩뿌리던 파란 눈동자가 어느새 부드러워져 있었다.
“이 정도 분노까지 끌어낼 의도는 아니었다.”
애쉬테일은 분기탱천한 애플잭을 직시하며 고개를 약간 옆으로 기울였다. 그의 눈동자는 색 뿐만 아니라 속내를 알 수 없는 깊이 또한 바다와 닮아 있었다.
“모친께서 언젠가 내게 이르시길, 어떤 포니를 진정으로 파악하고 싶다면 그가 분노해 있을 때를 봐야 한다고 하셨다. 그대의 분노는 진실했다. 분명 우리의 무례함으로 인한 것만은 아니었겠지.”
애쉬테일은 애플잭에게 다가서며 찬찬히 말을 이었다.
“그대의 분노는.......두려움에서 기인하는군. 그렇지 않나? 친구 때문에 말이지.”
애플잭은 두 눈을 감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그녀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저 트와일라잇의 병이 나을 수 있기를 절박하게 바랬다.......
“맞심더. 지는, 즈이가 갸를 구하지 못하게 될까봐, 그게 너무 무섭심더.”
애쉬테일은 오른쪽의 쉴드 메이든을 쳐다보았다. 두 번째 대치 상황이 진행되는 내내 그녀는 침착하고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전에 대시에게 창을 들이밀었던 폭발적인 모습과는 극명히 반대되는 태도였다. 애플잭과 같은 그녀의 녹색 눈동자는, 역시 애플잭과 마찬가지로 감정의 동요를 내보이고 있었다.
쉴드 메이든은 애쉬테일을 곁눈질했고,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의 굳어있던 얼굴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검붉은 색 어스 포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들에겐 스스로의 진술을 증명할 기회를 가질 자격이 있어 보이는 군. 우리가 성급했음을 인정하겠다."
그는 비로소 속내를 털어놓았다.
“모두들 긴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은 우리의 1년 중 가장 위험한 시기이기 때문이지. 코마가 무리의 대이동 시기다.”
“코마가? 그게 뭐지요?” 래리티가 물었다.
그녀의 천진한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듣는 이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하울링이 들판 전체를 가로질렀다.
“길더스Gildearth, 차렷!”
술렁대는 경비대원들을 향해 그들의 대장이 일갈했다. 단번에 혼란을 가라앉힌 애쉬테일은 래리티를 응시하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방금 그게 코마가다.”
그는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몸을 뒤로 돌렸다.
“샤프 사운드Sharp Sound. 보고하라.”
오렌지 색 갈기를 가진 검은색 포니가 앞으로 달려 나왔다. 샤프 사운드라 불린 그는 보랏빛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이상하리만치 긴 귀가 온 사방으로 회전하듯 쫑긋거렸다.
“동쪽입니다. 거리는.......12마일 정도입니다.”
"이 쪽으로 오지 않기를.” 쉴드 메이든이 중얼댔다.
“길더스, 집합!”
애쉬테일이 소리쳤다. 세 여행객들을 포위하고 있던 경비대는 일제히 왼쪽으로 빠져나가며 다시 줄을 맞춰 섰다. 정렬이 끝나자, 애쉬테일은 애플잭, 래리티, 레인보우 대시 쪽으로 돌아섰다.
“사사로운 의견을 말하자면, 나는 그대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대들을 통과시킬지 말지 결정하는 건 내 권한 밖의 일이다. 내가 그대들에게 제안할 수 있는 선택지는 이것이다. 우선 우릴 따라와라. 우린 최단거리 루트를 타고 그라제첼드Grazezeld에 도달해 하룻밤 묵을 것이다. 그 다음날 아침에 우리는 그대들을 호위해 수도 테치홀름Thatchholm에 들어갈 것이다. 그곳에 있는 신목의 법원Timbered Court에서, 길드데일 군주 해머 후프께 그대들의 사연을 고하라. 만약 군주께서 그대들의 여행을 윤허하신다면, 그대들은 길드데일 영토를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불허하신다 면, 경비대가 그대들을 드라켄리지 산맥까지 호위해 돌려보낼 것이다. 이상이 내가 제안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받아들일 텐가?”
“그렇게 되면 원래 우리가 예상했던 경로에서 한참은 벗어날 것 같은데.”
레인보우 대시가 반항적으로 투덜댔다. 애쉬테일은 고개를 저었다.
“아치백 산악지대는 서쪽 국경 너머에 있다. 그라제첼드는 여기서 서쪽에 있고, 테치홀름은 더 서쪽에 있지. 두 도시 사이의 평야는 평탄한 편이어서 행군에 용이하다. 그대들이 본래 가려했던 길도 내가 제안한 길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레인보우 대시가 뭐라 대꾸하려던 찰나, 래리티가 그녀의 목을 다급히 낚아챘다.
“오호호.......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애쉬테일 경?”
그녀는 다른 발굽을 흔들어 애플잭을 가까이 불렀다.
“빨리 결정을 내려주시오.”
애쉬테일의 채근을 뒤로하고, 세 포니들은 옹기종기 모여 머리를 맞댔다. 그 중 제일 먼저 입을 연 건 래리티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래도 우리한텐 별다른 선택권이 없는 것 같아. 혹시 괜찮은 아이디어가 있지 않은 한 말이야.”
대시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 한바탕 벌이기에는 짜식들 수가 너무 많긴 해.......”
“그건 안 된다! 싸우긴 싫데이!”
애플잭은 지면에 발굽을 내리쳤다.
“어차피 우리도 서쪽으로 가야 된데이. 그라믄 쟈들이랑 잠시 동안은 같이 가도 괘안치 않긋나? 뭐, 옆에서 간섭 받는 건 싫긴 하지만서두.......”
대시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나 친구들의 의견이 온건한 쪽으로 모이는 듯 보이자 마지못해 동의를 표했다.
“.......좋아.” 그녀는 짓궂게 토를 달았다. “그래봤자 이 땅쟁이 포니들이 이 몸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말이지. 뭐, 잠시 동안이라면 네 남자친구를 따라갈 수 있을 것 같긴 해, AJ.”
애플잭은 잡아먹을 듯이 레인보우 대시를 쏘아보았다. 질겁한 대시는 반사적으로 공중으로 날아오를 뻔했다.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내 귀에 들리게 했다간 가만 안 둘끼다, 레인보우 대시. 콱 마, 그 이쁘장한 무지갯빛 갈기랑 하늘색 터럭 싹 다 밀어버릴라.”
“알겠어, 알겠어! 미안해!” 대시는 식은땀을 흘리며 상황을 무마했다. “그냥 농담이었어, 농담! 농담 알지? 왜 있잖아, 전엔 자주 했었는데 요새는 아예 안하게 된 거.”
주름진 미간을 발굽으로 어루만지던 애플잭은 마음을 다잡고 애쉬테일에게 돌아갔다. 두 친구들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당신네들을 따라가기로 했심더.”
“그대들의 현명한 결정에 감사를 표한다.”
애쉬테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쉴드 메이든은 일행의 가까이에 서있는 유일한 길드데일 포니들이었다. 나머지 경비대원들은 여전히 오와 열을 맞춘 진형을 유지한 채 서 있었다.
“그대들은 쉴드 메이든과 나의 바로 뒤에서 달릴 것이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행군한다. 설령 그대들이 잘 따라오지 못한다 해도 속도를 늦춰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잘 따라오길 바란다. 코마가 무리와 마주치기 전에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이리로.”
쉴드 메이든이 일행에게 고갯짓을 했다. 세 이퀘스트리아 포니들은 그녀와 애쉬테일을 따라갔다. 둘의 인솔에 따라, 세 포니들은 경비대의 바로 앞에서 달리는 세 길드데일 포니들 앞에 각각 줄을 맞춰 섰다.
래리티는 조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길드데일 포니들은 어느 정도 속도로 달리려나? 설마 어제의 애플잭과 레인보우 대시만큼 빠르진 않겠지.......그치?
“길더스!”
애쉬테일이 어깨 너머를 돌아보며 호령했다.
“전진하라!”
애쉬테일이 달리기 시작하자, 쉴드 메이든이 그의 오른쪽에 따라붙었다. 레인보우 대시와 애플잭, 래리티가 그 뒤를 따랐고, 그들의 뒤에선 경비대가 앞줄부터 순서대로 발굽을 굴렀다. 거대한 어스 포니들의 행렬이 황금빛 평원을 가로지르며 일사분란하게 질주했다.
하울링이 들려왔다. 다행스럽게도 그것의 진원지는 이전 것보다 더 멀리, 더 뒤쪽에 있는 것 같았다. 경비대는 조금 전처럼 겁에 질려하지는 않았다. 거리도 거리였지만, 천둥 같은 발굽소리가 하울링을 덮어준 덕분이기도 했다.
래리티는 있는 힘껏 달음박질쳤다. 길드데일의 경비대원들은 애플잭과 레인보우 대시가 가장 빠르게 달릴 때와 거의 비슷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전날의 질주로 인한 피로에서 미처 다 회복되지 못한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여를 달린 뒤, 래리티는 자신이 친구들보다 뒤쳐져 있음을 깨달았다. 뒤에 있는 갈색 어스 포니의 코가 엉덩이에 닿을 정도로!
“계속 달려, 유니콘!”
래리티의 뒤에서 달리던 갈색 어스 포니가 으름장을 놓았다. 래리티는 이를 악물고 속도를 올렸다.
아흑, 빌어먹을! 길드데일 포니들은 끔찍해! 완전 끔찍하다구! 절대 마주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도대체 어떻게 우릴 발견한 거지?
세 이퀘스트리아 포니들 중 애플잭은 가장 왼쪽에 있었다. 래리티는 가운데, 레인보우 대시가 오른쪽이었다. 애쉬테일은 애플잭의 앞쪽에서 달리고 있었다. 애플잭은 속도를 올려 애쉬테일의 옆에 따라 붙었다. 소란스런 발굽소리 사이로 털털한 목소리가 외쳤다.
“뭣 좀! 물어봐도 될까예?!”
애쉬테일은 고개를 돌리진 않았지만, 대답은 했다.
“뭔가?”
“저 짝에 밀이 쫌 있던디-”
“그걸 건드렸나?”
날카로운 눈빛이 애플잭을 꿰뚫듯 노려보았다.
“아, 안 건드렸습니대이!”
애플잭은 줄기를 조금 씹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당신네들 밀인가 보지예?”
“그렇다. 길드데일 전역에 밀밭이 있지. 감자, 당근도 있고. 그 밖에도 들판에서 많은 식물을 키우고 있다.”
애플잭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당신네들도 농장을 하는 거 아입니까? 지도 농붑니더! 주로 사과를 키우지예. 그리고-”
“긴장을 늦추지 마라!”
검붉은 색 포니는 또 한 번 목소리를 높였다.
“혀를 놀릴 힘이 있으면 발굽부터 굴리도록!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린 해가 지기 전에 그라제첼트에 도착해야 한다!”
그는 다시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굳게 다물어진 입은 다시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애플잭은 불만스레 눈썹을 씰룩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애쉬테일의 냉혹한 태도에 가려진 순수한 자부심을 느꼈다. 게다가 길드데일 포니들 역시 농사를 짓는다는 사실이 썩 마음에 들었다. 대지와 작물을 아는 포니들이라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비록 감자, 당근, 밀 모두 스위트 애플 에이커의 주된 수확물은 아니었지만.
-
“길더스!”
애쉬테일의 입은 어느 정도 더 달린 뒤에야 다시 열렸다.
“감속!”
그의 구령에 따라 백여 기의 어스 포니들이 일제히 속도를 줄였다. 멈출 때까지 서서히 속도를 줄이는 기차 같은 모양새였다.
이윽고 경비대는 출발할 때와 다를 것 없는 정렬 상태로 멈춰섰다.
“정숙!”
애쉬테일이 소리쳤다. 조금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즉시 가라앉았다.
검붉은 색 어스 포니는 귀를 쫑긋댔다. 샤프 사운드의 귀도 쫑긋거렸다. 그는 경비대 바로 앞에서 달리던 세 길드데일 포니들 중 하나였다.
“샤프 사운드. 뭔가 들리는가?”
샤프 사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던 탓이었다. 그러나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들리지 않습니다, 대장. 따돌린 것 같습니다.”
“대장.”
다른 길드데일 포니가 애쉬테일을 불렀다. 행군할 때 래리티를 구박했던 그 갈색 포니였다.
“아무래도 저 쪽에서 아엘레로스Aeleroth가 오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녀는 애쉬테일의 뒤쪽 하늘을 고갯짓했다.
애쉬테일은 대원이 가리킨 쪽을 돌아보았다. 쉴드 메이든, 애플잭, 레인보우 대시, 래리티도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황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가운데에서 어떤 검은 형체가 길게 원을 그리며 강하하고 있었다.
“그래. 보이는 군.”
애쉬테일은 아엘레로스의 존재를 보고한 포니에게 명령을 내렸다.
“버드 스피크Bird Speak. 아엘레로스의 보고를 받아오도록.”
갈색 어스 포니 : 버드 스피크는 진열에서 달려 나가며 휘파람을 불었다. 독특한 바람 소리가 우렁찬 발굽 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그러자 하늘을 배회하던 검은 형체가 오른쪽으로 선회하며 버드 스피크를 향해 강하했다.
그것은 매였다. 깃털은 어두운 갈색이었고, 부리는 금색이었다.
버드 스피크가 앞다리 한쪽을 들어 올리자, 고도를 낮춘 매는 거기에 온순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제 앞다리에 앉은 맹금류의 제왕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아하, 틀림없어. 저 매가 우릴 찾아냈던 거야.
래리티는 맹금류의 그림자를 봤던 것을 떠올리며 추측했다.
만약 새들과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건 즉 하늘에도 눈이 달려있다는 거지.
조금 뒤, 아엘레로스는 늦은 오후의 붉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버드 스피크는 신속하게 경비대로 돌아왔다.
“아엘레로스가 본 바에 의하면, 몇 마일 범위까지는 아무 이상 없답니다. 남서쪽에 코마가 무리가 있긴 한데, 그 치들은 우리 쪽으로 오고 있지는 않다는 군요.”
“좋은 소식이군.”
애쉬테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치로!” 버드 스피크는 세 이퀘스트리아 포니 뒤로 돌아갔다.
“전진!”
애쉬테일의 구령에 경비대는 다시 한 번 일사분란하게 발굽을 굴렸다.
-
저녁 무렵이 되었다. 태양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애플잭은 멀거니 지평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시야 한구석에서 약간 솟아오른 반점 같은 돌출부를 발견했다. 한적한 자연의 풍경에서 처음으로 목격한 문명의 증거였다. 일행이 전진함에 따라, 그 돌출부는 점점 더 커지고 높아졌다. 그것은 집 같아 보이기도 했다.
“저 건물 같은 거 말인디.”
애플잭이 애쉬테일에게 물었다.
“그 쪽 집입니꺼?”
“그라제첼트다.”
짤막하게 대꾸한 뒤, 애쉬테일은 어깨 너머를 돌아보며 호령했다.
“목적지가 코앞이다! 길더스! 마지막 스퍼트를 내라!”
그러자 경비대 전원이 발굽을 더 세게 굴려대기 시작했다. 갑자기 빨라진 행군 속도에 애플잭마저 전속력으로 달려야했다. 호흡이 꼬인 래리티는 녹초가 된 채 죽을 동 살 동 달렸다. 래리티보다 체력이 좋고 몸도 가벼운 레인보우 대시는 사정이 좀 나았지만, 그녀 역시 편하게 달리고 있지는 않았다.
아, 제길! 멀쩡한 날개 두고 이게 뭐하는 짓거리야? 날 수만 있었어도!
지평선에 돋은 뾰루지처럼 보이던 돌출부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실체를 드러냈다. 그것은 거대한 건축물이었는데, 넓이 12에이커 이상의 광대하고 드높은 회색 기반암 위에 지어져 있었다. 그 건축물은 애플 가문의 붉은 헛간보다 10배는 더 웅장해 보였다.
건축물의 주 재료는 표면이 거칠고 굵은 목재였다. 속이 꽉 찬 나무 몸통들이 건물 안쪽에 기둥으로서 세워져 있었으며, 벽면과 목재로 짜인 광활한 지붕을 지탱했다. 지붕 위에는 못해도 십여 개의 굴뚝이 새싹처럼 솟아있었다. 그 중 몇 개에선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건물은 2층 구조로 되어 있었다. 지붕에는 발코니 같은 단 몇 개가 튀어나와 있었고, 납이 씌워진 두텁고 큰 원형 창문이 있었다. 창문은 동으로 된 테로 둘러져 있었으며, 그 용도는 태양빛을 반사시켜 건물의 위층에 빛을 들이는 것이었다.
뒤집어진 풀잎 모양의 동 재질 장식품들이 지붕의 모서리를 따라 둘러쳐져 있었다. 지붕의 맨 앞과 맨 뒤에는 가느다란 장대가 꽂혀 있었고, 거기에 각각 검붉은 색 삼각형과 황금빛 풀 다발이 그려진 깃발이 걸려 있었다.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을 무렵, 경비대는 그라제첼트의 거대한 관문에 도착했다. 관문은 나무로 되어 있었으며, 그라제첼트 성의 기반암에 만들어져 있었다.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장비한 두 길드데일 포니가 관문의 양 쪽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의 목에는 철제 목걸이가 걸려 있었고, 그 목걸이엔 관문을 통제하는 굵은 밧줄이 묶여 있었다.
“길더스! 감속!”
경비대가 관문의 지근거리에까지 다다르자, 애쉬테일은 한 번 더 소리를 질렀다.
“그라제첼트 수비대! 이 쪽은 동부 구역 원수 애쉬테일이다! 순찰 임무를 완료했다! 관문을 개방하라!”
관문 앞에 서 있던 두 포니는 각각 문의 오른쪽 끝과 왼쪽 끝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각자 목에 걸린 목걸이를 강하게 잡아당겼고, 그러자 관문이 천천히 열렸다. 기반암의 꼭대기로 이어지는 경사로가 관문 사이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정지!”
경비대는 열리고 있는 관문을 목전에 두고 멈춰 섰다.
이윽고 관문이 완전히 열리자, 애쉬테일은 관문을 지키는 헌병들에게 지시했다.
“오늘 밤까지 그라제첼트 요새 관문은 완전히 봉쇄하겠다! 수비대는 잠금쇠를 걸고 요새 안으로 귀환하도록 하라!”
그는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길더스! 전진!”
앞으로 나아가는 애쉬테일 옆으로 쉴드 메이든이 뒤따랐다. 그들 뒤로 세 이퀘스트리아 포니들과 경비대가 발굽을 움직였다.
그들은 돌로 된 경사로를 올라 그라제첼트의 기반암 위에 도달했다. 칠흑 같은 밤이었지만, 그곳에서 내려다보이는 길드데일의 황금빛 평원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마지막 줄의 경비대원들까지 관문을 넘자, 관문을 지키던 두 포니는 다시 관문을 닫기 시작했다. 마침내 관문이 완전히 닫히자, 금일 요새의 출입구가 봉쇄되었음을 알리는 타격음이 두 번 울렸다.
이제 허락 없이는 여기서 나갈 수 없다, 이런 말이겄제.
애플잭은 몸을 움찔거렸다.
모든 경비대원들이 기반암 위에 오르자, 애쉬테일과 쉴드 메이든은 경비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금일 순찰 임무는 이걸로 종료다! 길더스, 해산!”
엄격했던 진형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많은 이들이 그라제첼트의 본성(本城) 쪽으로 발굽을 옮겼고, 몇몇은 둘 셋씩 짝을 지어 수다를 떨었다. 어떤 이들은 기반암의 모서리로 가서 별이 막 뜨려하는 늦은 저녁의 하늘을 감상했다.
“세상에, 셀레스티아님 맙소사!”
래리티는 아픈 다리를 한 쪽씩 털어대며 징징댔다.
“다리에 알 엄청 배겼을 거야! 너무 힘들어! 완전 죽겠어!”
애쉬테일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오늘 밤엔 푹 자두는 게 좋을 것이다. 내일도 오늘처럼 달려야 테치홀름에 도착할 수 있다.”
그는 부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쉴드 메이든. 우리 손님들이 많이 지친 모양이니, 뭔가 먹을 것을 좀 갖다 주도록.”
“알겠습니다, 대장님.”
“흐-응, 이제야 손님 대접 해주시는 군.” 대시가 작은 목소리로 쫑알댔다.
“레인보우!” 애플잭이 대시를 노려보며 쉿 소리를 냈다.
“조금 후에 다시 보도록 하지. 지금은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다.”
검붉은 색 어스포니는 그라제첼트 쪽으로 발굽을 돌렸다. 그는 이내 마파(馬波) 속에 모습을 감췄다.
상관이 자리를 비우자, 쉴드 메이든은 빠른 걸음으로 레인보우 대시에게 다가갔다. 당한 바가 있던 대시는 순간적으로 몸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동그랗게 떠진 초록색 눈동자엔 일말의 적의도 없었다.
“낮에 있었던 일은 미안하게 됐어요. 모든 위협과.......모욕으로부터 대장을 지키는 게 제 임무라서요. 대장의 명예가 실추되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었거든요.”
“어.......” 대시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어.......으응, 그럼. 난 괜찮아. 괜찮을 거야, 아마도. 분명.”
쉴드 메이든은 일행을 그라제첼트의 정문으로 이끌었다.
“어서들 와요. 지금쯤이면 저녁 식사가 다 만들어졌을 거예요. 오늘 메뉴는 뭘 지 같이 가서 보도록 하죠.”
<“어서들 와요. 지금쯤이면 저녁 식사가 다 만들어졌을 거예요. 오늘 메뉴는 뭘 지 같이 가서 보도록 하죠.”>
그라제첼트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대로 내부도 굉장히 넓었다. 검고 굵은 나무 기둥들이 중앙회관의 드높은 천장을 떠받들고 있었다. 회관의 가운데에는 거대한 석재 화구가 있었고, 그 크기에 걸 맞는 불꽃이 화구에 피어나 있었다. 화구 주변에는 낡은 소파들이 놓여있었는데, 그 위엔 많은 길드데일 포니들이 느긋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 외에도 회관 곳곳에 비슷한 소파들이 무작위로 흩어져 있었다.
소파 두는 위치를 엄격하게 정해 두진 않았나보네.
주변을 관찰하던 래리티의 추론이었다.
그들이 지나온 기둥들은 추상적이고 인상적인 무늬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 색도 어두운 녹색과 검붉은 색, 황금색 등 다양했다. 돌로 된 바닥엔 각양각색의 여러 카펫들이 깔려 있어서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회관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각각 왼쪽과 오른쪽으로 통하는 두 개의 출입구가 있었다. 그 사이엔 석판이 쌓여 있었고, 석판 위에는 나무로 보강된 튼튼해 보이는 소파가 놓여 있었다. 그 소파 뒤에는 나무 기둥이 있었고, 그 꼭대기에는 애쉬테일의 투구에 그려진 문양 : 은색 화살표가 그려진 황금 나침반이 거대한 크기의 실물로 놓여 있었다.
저 소파의 위치는 엄격하게 정해져 있는 것 같아.
래리티는 추론을 덧붙였다.
쉴드 메이든은 애플잭, 래리티, 레인보우 대시를 이끌고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앞에 있는 연단을 지나 문을 열고 꾸불꾸불하지만 짧은 복도를 지났다.
이어서 나타난 장소는 넓은 공동 식당이었다. 양쪽에 긴 벤치를 거느린 긴 나무 테이블이 수없이 많이 놓여있었다. 뒤쪽 벽에 난 창문은 열려있었는데, 그곳을 통해 어슴푸레하게 부엌이 보였다. 부엌의 모든 오븐과 구덩이들엔 불이 피워져 있었고, 그 위에서 넓적한 무쇠 가마솥들이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끓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많은 수의 길드데일 포니들이 모여 앉아 석재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거나 수다를 떨었다. 이따금씩 왁자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쉴드 메이든은 선객(先客)들을 지나 부엌 창문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세 이퀘스트리아 포니들은 하얀 갈기를 쫓아 주춤대면서도 발굽을 옮겼다.
부엌은 굉장히 소란스러웠다.
“키트 콜드런!”
그러나 이 정도 소음은 드문 일도 아닌 지, 그녀는 첫 음절부터 큰 소리로 외쳤다.
“내 옆에 배고파하는 포니가 셋이나 있는데! 뭐 먹을 것 좀 없어?”
“당근 수프가 있지!”
야위고 각진 몸을 가진 하얀 어스 포니가 대답했다. 그의 몸엔 앞치마가 둘러져 있었다.
“게다가 오늘은 신선한 곡물이 들어왔거든. 빵도 좀 내줄 수 있을 거야.”
“빵?! 빵이라고!?”
뒤에 서 있던 레인보우 대시가 환희에 찬 비명을 지르며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부엌 창문 앞에 다다른 그녀는 계산대를 발굽으로 두들겨댔다.
“빵! 빵 줘, 빨리! 당장 그걸 먹어야겠어! 꼭! 진짜! 반드시!”
키트 콜드런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휘둥그레 해졌다. 다른 길드데일 포니들도 키트 콜드런과 비슷한 수준으로 경악스러워했다. 경악보다 짜증을 내비치는 이들도 더러 있었는데, 그들은 계산대 앞에 줄을 서 있다가 대시에게 새치기를 당한 피해자들이었다.
“레인보우, 이 가스나야! 제발 쫌! 줄부터 서라! 니 차례 아직 멀었다 아이가!”
대시는 뒤늦게 냉정을 되찾고 왼쪽을 곁눈질했다. 줄을 선 어스 포니들의 따가운 눈총이 느껴졌다.
푸른 페가수스는 줄 선 포니들에게 발굽을 흔들며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아하하, 미안해, 다들! 새치기할 생각은 없었어.”
레인보우 대시는 힘없이 날개를 파닥이며 친구들에게 돌아왔다. 쉴드 메이든은 다른 포니들보다 조금 덜 경악스러워하긴 했지만, 어쨌든 놀라워하는 시선으로 대시를 응시했다.
“방금 건 미안해, 쉴드 메이든.”
“레인보우 요 가스나는 먹을 거 앞에선 마 눈까리가 확 돌아삡니데이.”
애플잭이 노골적으로 말했다. 대시는 그녀를 향해 짓궂게 혀를 내밀었다.
쉴드 메이든의 얼굴에 웃음기가 맺혔다.
“많이 배가 고팠겠죠. 이해해요. 딱히 피해가 있었던 것도 아니구요. 오히려 좋은 볼거리였는걸요.”
“볼거리? 나 말하는 거야?” 대시가 고개를 갸웃댔다.
“그럼요. 길드데일에는 살면서 한 번도 페가수스를 본 적이 없는 포니들이 많아요.”
흐린구름색 포니가 귀띔했다.
“흐음. 방금 그 정도가 너희들에겐 볼거리라구?”
대시는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두고 봐. 방금 건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언젠가 진짜 쇼를 보여주지!”
쉴드 메이든은 일행을 줄 맨 끝으로 안내했다. 다행히 줄은 빠르게 줄어들었고, 그들은 곧 수프 한 그릇과 빵 몇 덩이가 담긴 나무 쟁반을 입에 물 수 있게 되었다. 래리티는 마법으로 쟁반을 들어 올렸는데, 이 역시 조금 전 대시와 비슷할 정도로 주변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주목받고 있음을 느낀 새하얀 유니콘은 빗을 꺼내 갈기를 빗으며, 긴 속눈썹을 괜스레 깜빡댔다.
“.......”
그 꼴을 지켜보던 애플잭은 물고 있던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옆에 있던 빈 쟁반을 물어 들고는, 그걸로 래리티의 엉덩이를 냅다 후려쳤다.
“꺄악!”
애플잭은 침을 뱉듯 쟁반을 뱉은 뒤 잔소리를 퍼부었다.
“아, 래리티, 니는 또 왜 갑자기 쌩쑈를 하고 자빠졌노? 퍼뜩 가서 앉기나 해라, 이 가스나야!”
“.......흥!”
래리티는 씩씩대며 쉴드 메이든을 따라 테이블에 앉았다.
“먼저들 드세요.”
일행이 모두 앉자 쉴드 메이든이 말했다.
“전 갑옷을 좀 벗고 와야 해서요. 좀 이따가 바로 올게요.”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공동 식당을 빠져나갔다.
“빵 더 드시겠수?”
빵이 잔뜩 얹어진 쟁반을 등에 진 포니가 일행의 테이블 옆을 지나가며 물었다.
“응응응! 더 줘!”
레인보우 대시는 열광적으로 고개를 끄덕댔다. 그녀의 수프 그릇은 이미 개 핥은 죽사발처럼 깨끗했다.
“맛나게 드슈!”
빵 배달 포니는 커다란 빵 한 덩어리를 잘라 대시의 쟁반 위에 올려주었다. 대시는 곧장 빵을 집어 들고는 게걸스럽게 입안에 쑤셔 넣었다.
“아휴, 정말! 레인보우 대시!”
래리티는 질색을 했다. 대시가 물고 있는 빵에서 아직 입 안에 들어가지 않은 부분이 마법으로 떼어졌다.
“테이블 매너라는 건 말이지, 너든 누구든, 우리 중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거란다! 특히 지금처럼 테이블에서 식사할 때는 더더욱! 왜 ‘테이블’ 매너겠니? 최소한 테이블에서 식사할 때는 테이블 매너를 지켜야지!”
래리티는 대시의 입 앞에서 잘라낸 빵을 끝에서부터 조금 찢어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한테는 빵 칼이 없으니까. 이건 허용 범위 이내야. 빵을 무슨 뱀이 쥐 잡아먹듯이 통째로 삼키려고 드는 건.......솔직히 굉장히 무례하고 몰상식해보여. 이건 페가수스 뿐 아니라 유니콘이나 어스 포니한테도 해당되는 얘기야.”
대시는 삐진 망아지마냥 뒷다리를 세워 가슴 앞에 모았다.
“알겠어. 알겠다구.”
그녀는 뾰로통해진 얼굴로 빵조각을 집어 입에 던져 넣었다. 그리곤 입을 다물지 않은 채로 음식물을 씹어댔다.
“씹을 땐 입 좀.......어이구, 어이구 속 터져.......”
래리티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으며 탄식했다.
“진짜 답이 없구나, 레인보우.”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자.”
입 안 가득 빵을 채워 넣은 레인보우 대시가 우물대며 말했다.
“그렇게 예의 차리느라 시간 낭비하다보면, 정작 차려져있는 식사도 즐기지 못하게 된다구.”
“.......답이 없진 않네.” 래리티는 무미건조하게 대꾸했다. “죄다 오답이지만.”
옆에서 일어나는 사단을 지켜본 애플잭은 카우걸 모자를 슬그머니 벗었다. 그리곤 두 발굽으로 그릇을 들고 수프를 한 모금 마셨다.
거, 맛이 기가 멕히네!
수프는 적당히 달달했고, 걸쭉하지 않으면서도 점도가 있어 식감도 좋았다. 이어서 그녀는 빵도 먹어보았는데, 빵 역시 수프와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웠다. 제과점에서 팔 것 같은 맛은 아니었지만, 담백하게 맛있었고 포만감이 들었다.
래리티 또한 만족스럽게 식사를 즐겼다.
“으음, 세상에, 정말 맛있는걸.”
그녀는 맛에 대한 감상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풀이나 뜯어먹던 나날로부터의 달콤한 휴가 같아. 여기 오는 건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벌어진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잘 생각해보면, 우린 제법 운이 좋았던 것 같지 않니?”
“이것만은 분명하데이. 여기 포니들은 우릴 충분히 환영해주고 있다.”
애플잭은 래리티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단서를 달았다.
“그치만은, 내는 어째 해머 후프 경이 우리 쪽 얘기를 잘 안 들어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데이.”
“애쉬테일하고는 좀 이야기가 통했던 것 같은데.” 래리티가 말했다.
“그건 그랗제. 부러 승질 돋우는 짓만 안 한다면야, 갸도 괘안은 녀석인 듯 싶다. 그치만 갸가 말했던 대로, 이건 갸가 어째 해 볼 수 있는 일이 아인 거제. 다 해머 후프 경한테 달린 일인기라. 만에 하나 해머 후프 경이 무단 침입자들한테 빡시게 구는 포니면은.......설득하기가 쉽지만은 않겄제.”
레인보우 대시는 씹던 빵을 단숨에 삼키며 화제에 끼어들었다.
“난 최악의 경우도 대비해둬야 한다고 봐. 만약 해머 후프 경을 설득하는데 실패하고, 여기 포니들이 우리를 체포하려 한다면? 그 땐 싸워서라도 서쪽으로 가야겠지!”
“말로는 쉽겠제, 레인보우. 막말로, 니 빼곤 죄다 땅쟁이들 뿐이다 아이가.”
“내가 텔레포트를 할 수만 있었다면.......”
“래리티, 그런 생각은 할 필요도 읎다! 또 다른 방법이 있을끼다. 일단.......최악의 경우엔, 레인보우. 니 혼자라도 가야 한데이.”
장밋빛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엥, 진짜?! 설마 네가 그런 말을-”
“다 같이 가야한다, 고 내가 말하긴 했었제.”
오렌지 색 어스 포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만 그건 이런 사단이 날 줄 모르고 했던 얘기인기라. 상황이 영 안 좋게 돌아간다 싶으면은.......그 땐 차선책으로라도 대응을 해야지 않긋나.”
대시는 입을 굳게 다물고 애플잭을 직시했다. 진중한 녹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녀의 시선을 맞이했다.
“.......그래, 좋아.” 대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자구.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레인보우 대시는 그제야 자신이 바라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친구들을 뒤에 두고 갈 순 없어! 그러기 싫어!
“당연하제.”
그 때, 누군가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식사들은 즐기고 계신가요?”
일행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갑옷을 입지 않은 쉴드 메이든이 서 있었다. 그녀의 흐린구름색 털가죽엔 거친 나라에서 살아왔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윤기가 흘렀다. 그리고 엉덩이에는.......
“큐티마크잖아! 너도 큐티마크가 있었어?!”
레인보우 대시가 소리쳤다. 쉴드 메이든의 양쪽 엉덩이에는 금색과 검붉은 색으로 칠해진 다리미꼴 방패heater shield 문양이 있었다.
“당연히 있죠.” 흐린구름색 포니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포니가 이퀘스트리아에만 사는 건 아니랍니다.”
“아, 그, 그럼, 물론이지.”
“여기 사는 포니들도 큐티마크를 갖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래리티는 대시보다 점잖은 방식으로 놀라움을 표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크흠. 큐티마크는 사실.......마법적인 거잖아요? 제 말은,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왕국은 마법에 대해 좀 민감하게 반응하는 면이 있지 않나요?”
“그건 오해에요. 큐티마크의 마법은 모든 포니들이 가진 자연스러운 거잖아요. 길드데일 포니들이 모두 큐티마크를 얻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결국 얻게 되죠. 게다가 우린 큐티마크를 얻기 전까지는 제대로 된 이름도 갖지 못하는 걸요.”
“어머. 그럼 당신은 어릴 땐 뭐라고 불렸죠?”
“그레이 필리Gray filly요. 암망아지는 필리Filly, 숫망아지는 콜트Colt. 털색을 앞에 붙여서 구분해요.”
흐린구름색 포니는 나긋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정 큐티마크를 얻지 못한 포니의 경우에는, 성년식을 할 때 정식 이름을 짓죠. 큐티마크를 얻은 경우에는, 부모님과 거주 구역의 원수님과 상의해서 이름을 정해요. 이 이름은 반드시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해요. 첫 번째. 그 이름을 쓰게 될 포니의 마음에 들어야 할 것. 두 번째. 주변의 포니들이 이름만 보고도 그 이름을 쓰는 포니가 무슨 일을 하는 지 알 수 있어야 할 것. 두 번째 조건은 유사시에 유용하죠. 어떤 포니에게 어떤 재능이 있고 어떤 역할을 맡길 수 있는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 네 이름인 ‘쉴드 메이든’은.......” 대시가 물었다.
“전사죠. 저는 길드데일의 영민과 영지를 지키는 일을 해요.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용기를 갖고 임하려고 노력한답니다.”
세 이퀘스트리아 포니들은 쉴드 메이든의 흉포했던 모습을 떠올렸다. 어쩐지 이 흐린구름색 전사의 자기소개가 조금도 허풍처럼 들리지 않았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 래리티가 물었다.
“그럼 애쉬테일은 어떻죠? 이름만으로는 무슨 재능이 있는 건지 전혀 유추가 안 되는 걸요. 애쉬테일.......이건 그건 그냥 털색이잖아요?”
“대장은 좀.......어.......경우가 달라요.”
쉴드 메이든은 말을 얼버무렸다.
“대장 스스로 원하신다면, 여러분에게도 직접 말해주실 거예요.”
그리곤 은근슬쩍 자리를 떴다.
“저런, 내 정신 좀 봐! 다들 식사를 못하고 계셨네요-저도 그렇고! 수프 좀 받아 올게요.”
쉴드 메이든이 멀어지자 대시가 기다렸다는 듯 투덜댔다.
“뭐야, 이게? 재들은 자기네 망아지를 그냥 ‘야, 거기 누런 꼬맹이.’ 이런 식으로 부른다는 거잖아? 어이가 없네.”
“들어보니 말이 되는 것도 같기는 헌디.......”
애플잭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어린 망아지들한테 이름을 안주는 건 좀 아닌 것 같데이.”
“다들 문제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지 않니? 얘기해보니, 별다른 불만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거든.”
“얘기? 여기 포니들 중 우리랑 제대로 얘기 해본 건 쉴드 메이든 밖에 없어! 게다가 걘 자기 나라 얘기만 했지, 자기 얘긴 거의 안 해줬잖아!”
레인보우 대시가 사족을 달았다.
“그리고 하나 더. 난 걔가 사과한 거 안 믿어. 니들 다 봤지? 내 얼굴이 창에 꿰일 뻔 했다구! 걘 미쳤어!”
“레인보우 대시. 그건 성급한 판단이야.”
래리티가 대시를 타일렀다.
“누구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 한 순간만 가지고, 그것도 감정적으로 불안했던 그 순간에 저지른 행동만 가지고 한 포니의 전부를 평가해서는 안 돼. 그럴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어.”
“애쉬테일이 했던 말하고는 완전히 다르네.”
대시는 쫑알대며 수프를 한 모금 홀짝였다.
“글쎄. 난 애쉬테일한테 특별히 어떤 감정이 있거나 하진 않아. 좋은 지 싫은 지 잘 모르겠어.”
새하얀 유니콘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우릴 하룻밤 재워주고 있긴 하지만 말이지.”
“니 아까는 뭐, 갸랑은 얘기가 좀 통한 것 같다 어쨌다 카지 않았었나?”
애플잭은 어쩐지 애쉬테일을 옹호해줘야 할 것 같다는 강한 의무감을 느끼고 있었다.
갸가 우릴 대접해주는 기 사실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가 아니라믄 말이제.
“그랬지. 앞으로도 얘기가 통할 진 더 두고 봐야할 문제겠지만.”
대화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듯 보이자,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쉴드 메이든이 일행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래리티의 옆에 앉아 쟁반을 내려놓았다. 수프를 들이킨 뒤, 그녀는 녹색 눈동자를 깜박이며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어, 음. 미안해요. 식전 기도는 생략했어요. 이퀘스트리아에선 어떤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지 몰라서.......”
“이퀘스트리아의 누군가는 기도를 할 수도 있겠지만, 미안해할 것 없어요. 적어도 우리 셋은 안 하거든요.”
래리티가 물었다.
“길드데일에서는 어떻죠?”
“가끔은 해요. 태양과 달을 움직이시는 태양 여왕께 감사 기도를 올린답니다.”
“그거 말인데, 셀레스티아 공주님은 이제 달은 안 움직이셔.”
레인보우 대시가 쉴드 메이든의 말을 정정했다.
“안 하신다구요? 하지만 어젯밤에도 달을 봤는걸요.”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여동생이신 루나 공주님께서 하신데이.”
애플잭이 설명했다.
“루나 공주님은.......잠깐 어데 좀 가 있으셨던 기라. 근디 지금은 돌아오셨데이. 게다가 달은 원래 루나 공주님께서 관리하시는 거이기도 했고 말이제. 그래서 지금은 루나 공주님께서 달을 맡고 계시데이.”
쉴드 메이든의 눈이 휘둥그레 하게 떠졌다.
“위대한 어머니 대지께 맹세코, 태양 여왕께 여동생이 있다는 건 몰랐어요!”
“이래저래 사연이.......많아.”
대시가 말했다. 세 이퀘스트리아 포니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남은 식사 시간 동안 일행은 루나에 대한 것들을 설명했다. 다만 에버프리 숲에서의 모험이나 조화의 원소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우리가 조화의 원소 수호자들이라는 건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조금 전의 눈빛교환으로 이루어진 암묵적인 합의였다.
그렇게 여섯 친구들의 첫 번째 우정 모험기는 실제보다 굉장히 단조로워졌다. 하지만 일행의 걱정과는 달리, 쉴드 메이든은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흥미로워하며 이야기를 경청했다.
“작년에 있었던 일이 설명이 되네요.”
흐린구름색 포니는 마지막 빵 조각을 씹으며 말했다.
“작년 하지 태양절 때 밤이 평소보다 길었거든요. 분명히 아침에 일어났는데 그때까지도 하늘이 어두컴컴했던 거 있죠! 그게 사악한 달의 여신 때문이었다구요?”
“그런 셈이제. 정확히는 나이트메어 문이라 한데이.” 애플잭이 대답했다. “그래도 지금은 사라진기라. 루나 공주님은 자격과 권능을 되찾으셨고.”
“정말 흥미롭군요.”
쉴드 메이든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하지만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자기 전까지 여러분과 같이 해야 할 일들이 있거든요. 일단 쟁반부터 반납하러 가죠.”
쉴드 메이든은 쟁반을 입에 물고 앞장섰다. 래리티를 포함해, 일행 모두 쟁반을 입에 물고 그녀를 따랐다.
공동 식당에서 나온 그들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애쉬테일과 맞닥뜨렸다. 그 역시 갑옷을 벗은 상태였다. 회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그어진 풍성한 갈기가 불그스름하고 탄탄한 몸에 덮여 있었다.
“식사가 길었군.”
애쉬테일이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갑옷을 입었을 때만큼 눈에 띄는 인상은 아니었지만, 그의 기골은 여전히 장대했고 근육은 오히려 더 돋보였다.
“죄송합니다, 대장.” 쉴드 메이든은 고개를 숙였다.
“문제없다.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서 여섯 번째 방에 가보면 지금은 안 쓰는 침대가 있을 것이다. 그대들은 오늘밤 거기서 취침한다. 그 전에.”
애쉬테일의 파란 눈동자가 순찰 임무를 수행할 때처럼 굳어졌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린 내일 먼 거리를 달려야 한다. 코마가 무리의 영역도 통과해야 하지. 그러니 쉴드 메이든. 가능하다면 손님들을 데리고 무기고로 가서 입혀줄 만한 갑옷을 좀 찾아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대장.”
쉴드 메이든은 이퀘스트리아 포니들을 돌아보며 나긋하게 말했다.
“모두 절 따라오세요.”
래리티, 레인보우 대시 그리고 애플잭은 애쉬테일을 지나쳐 왼쪽 계단에 발굽을 디뎠다.
일행이 애쉬테일을 스쳐 지나던 순간에, 애플잭은 애쉬테일 쪽을 곁눈질했다.
응? 저게 뭐고?
그녀는 갑작스런 혼란을 느꼈다.
갑옷 벗은 게 아니었든가?
애쉬테일의 엉덩이는 ‘드러나 있지 않았다.’ 즉, 아직도 갑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착각은 단순히 그의 털색이 갑옷 색깔과 비슷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니, 아니제. 갑옷은 분명 벗었데이. 가만, 그럼 그게 설마.......
애쉬테일의 엉덩이에는 중간 부분이 띠로 묶여있는 황금빛 풀 다발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길드데일 경비대의 갑옷에 그려져 있던 것과 같은 문양이었고, 일전에 봤던 길드데일의 석판에 새겨져 있던 문양이기도 했다.
큐티마크! 길드데일의 상징이랑 갸의 큐티마크가 똑같은 모양인기라!
애플잭은 놀람과 동시에 자문했다.
어데 보자, 이게 의미하는 바가 분명 있을 낀데.......
< 어데 보자, 이게 의미하는 바가 분명 있을 낀데.......>
애플잭이 고민에 빠진 동안, 쉴드 메이든과 일행은 왼쪽 계단과 연결된 문을 지났다. 문 건너편에는 돌로 된 내리막길이 있었는데, 그 길은 기반암을 깎아 만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들은 곧 거대한 석실(石室)에 도착했다. 드높은 벽을 따라 긴 선반이 줄줄이 설치되어 있었다. 각 선반 위에는 수많은 상자들과 몇 개의 큼지막한 서랍들이 있었고, 그 반대쪽에는 작은 포네킹Ponyquin들이 수없이 놓여 있었다.
고민은 잠시 접어두고, 애플잭은 포네킹들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포네킹들은 넓은 지지대 위에 세워진 장대에 꽂힌 채 직립해 있었다. 그러나 이 포네킹들이 카루셀 부티크에 있는 포네킹들과 같은 종류의 물건이라는 걸 그녀가 이해하기까진 조금 시간이 걸렸다. 이는 비단 애플잭의 기억력이나 이해력 문제는 아니었다. 부티크에 있는 것들에 비하면, 지금 보이는 것들은 미완성품처럼 보일 정도로 거칠고 어설퍼 보였다.
무엇보다, 이 곳의 포네킹들은 하나 같이 나신(裸身)이었다.
“안타깝지만 갑옷은 전부 사용 중이군요.”
쉴드 메이든이 헐벗은 포네킹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분조차 없네요. 하지만 무기라면.......”
포네킹들 사이를 벗어난 그녀는 커다란 나무 상자 앞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리곤 상자를 열더니, 안쪽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잠시 후,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입가엔 무언가 빛나고 날카로운 것이 물려 있는 채였다.
“거기 어스 포니 분. 성함이 애플잭이었죠?”
“맞습니데이.”
“농장에서 일했다고 하셨죠? 그럼 발굽 도끼도 다뤄보셨나요?”
“써보기야 써봤는디.......장작 팰 때나 써봤지예.”
“받으세요.”
쉴드 메이든은 머리를 아래에서 위로 휘둘렀다. 입가에 물려 있던 무언가가 애플잭의 발굽 앞에 툭 떨어졌다. 그것의 한쪽 면에는 도끼날이, 다른 한 쪽 면에는 포니의 앞다리에 잘 고정되도록 하는 가죽과 끈이 묶여 있었다.
겸손하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애플잭은 발굽 도끼라면 익숙했다. 장작 팰 때가 아니더라도 농장 일을 하다보면 발굽 도끼를 쓸 일이 많았다.
다만 지금 애플잭의 발굽 앞에 있는 발굽 도끼는 그녀가 농장에서 쓰던 것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더 질기고 튼튼한 가죽이 사용된 티가 났고, 도끼날 부분은 더 두껍고 크면서도 눈에 띄게 날카로웠다.
“내일 그 녀석을 휘둘러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몰라요.”
쉴드 메이든이 말했다. 애플잭은 흠칫대며 ‘무기’로부터 발굽을 떨어뜨렸다.
“뭔가를 죽이고 싶지는 않습니데이.”
“그렇게 바란다고 바뀌는 건 없어요.”
쉴드 메이든은 단호한 눈빛으로 애플잭을 바라보았다.
“코마가들은 악랄하고 포악해요, 언제나 피에 굶주려 있죠. 당신이 어떤 마음가짐을 갖든, 스스로를 지킬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당신은 편리한 먹잇감에 불과해요.”
그녀는 푸른 페가수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레인보우 대시죠? 뭔가 필요한 무기가 있으신가요?”
“어.........음, 글쎄.......”
이런 주제에 대해선 일찍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레인보우 대시는 짐짓 대담무쌍한 표정을 지으며 가슴을 쭉 내밀었다.
“필요 없어! 아무 것도! 알잖아, 나 페가소스야! 날씨를 조종한다구! 뭐든 내 앞에서 까불면, 확 그냥 토네이도로 날려버릴 거야!”
쉴드 메이든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대시는 한껏 의기양양해했다.
“아, 맞다. 그랬죠. 잊고 있었네요.......”
그러나 그녀는 끝내 이 말까지 입에 담고 말았다.
“.......당신 같은 페가수스들은 번개를 내리쳐서 공격할 수도 있죠?”
대시의 귀가 머리에 착 달라붙었다.
“번개, 말이지.......사실 번개는 안 돼.”
그녀는 곧바로 자신감 있는 모습을 가장(假裝)했다.
“그래도 비바람은 쓸 수 있어! 그러니까 괜찮아!”
“그럼 문제없겠군요.”
쉴드 메이든은 순순히 납득했다.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래리티를 향했다.
“당신은 유니콘이죠. 교전 상황 발생 시에 마법으로 대응할 수 있을 거라 보는데, 가능하신가요?”
래리티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저, 저.......저는.......”
그녀는 뭔가 말하려는 듯 애써 입을 벌리긴 했지만, 노력만큼의 소득은 없었다.
“그.......저기, 제 마법은.......그렇게.......뭐랄까........대단히.......”
마지막 말을 뱉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플러터 샤이의 소심한 비명 같았다.
“.......공격적이지 못해요오........”
쉴드 메이든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당신에게 어울릴 만한 무기를 한 번 찾아보도록 하죠.”
흐린구름색 어스 포니는 다시 상자를 뒤지기 시작했다. 래리티의 푸른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무기가 필요하단 말이 아니랍니다.”
그녀는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저는 싸우고 싶지 않아요. 말씀하신 그 ‘교전 상황’이 발생한다면, 저는.......모르겠어요. 애초에 그 상황 속에 있고 싶지도 않구요.”
쉴드 메이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상자 밖으로 몸을 꺼낸 그녀는, 이번엔 몸을 벌떡 일으켜 뒷다리로만 선 채로 선반을 뒤지기 시작했다.
“부탁이에요, 친애하는 쉴드 메이든 양.”
래리티는 심약하게 웃으며 간청했다.
“나 때문에 고생할 것 없어요. 설령 무기를 든다 해도, 난 그걸 쓰는 방법조차 모를 거라구요!”
쉴드 메이든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이제 그녀는 선반의 두 번째 줄을 뒤지고 있었다. 입과 발굽이 총동원된 수색작업이었다. 온갖 물품들이 뒤엎어지며 일어나는 소음은 그녀가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아직 찾지 못했다는 것을 여실히 알려주었다.
“이보세요, 쉴드 메이든 양.” 래리티가 조금 강경해진 투로 말했다. “제가 분명히 말하건대-”
“오-호-호!”
그 때, 선반 가장 아래칸에서 신명나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온몸의 절반 이상이 선반에 들어가있던 쉴드 메이든이었다. 그녀는 뒷다리를 버둥대며 무언가를 끌고 나오고 있었다.
“세상에! 이것 좀 봐요! 설마 했는데 찾아냈어요!”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댄 끝에, 쉴드 메이든은 선반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녀의 입에는 길고 눈부신 무언가가 물려 있었다.
“멋진 발키리를 위한 아름다운 죽음의 보석!”
쉴드 메이든은 일명 ‘죽음의 보석’을 땅에 내려놓았다. 사실 그것은 보석이 아니라 약 45cm 길이의 칼날이었다. 날은 기품 있는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끝부분이 몸통부분보다 무거워 보였다. 아랫부분엔 길고 탄력 있는 가죽끈이 묶여있었고, 그 속은 비어있는 것 같았다.
칼날은 깔끔한 반투명 빛깔이었다. 겉보기에는 금속 재질보단 유리나 크리스탈 재질에 더 가까워보였다. 양 면에는 어린 포도나무의 덩굴손 같은 무늬가 우아한 금선으로 그어져 있었다. 무기라면 치를 떨며 피하던 래리티마저 잠깐 동안 그 아름다움에 눈길을 빼앗겼다.
“이게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네요.”
쉴드 메이든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이건 고대의 어느 구역 원수를 위한 선물이었을 거예요. 분명히 유니콘을 위한 거였겠죠. 봐요. 뿔에 딱 끼울 수 있게 되어 있잖아요?”
쉴드 메이든은 칼날의 아랫부분을 코로 밀어 일행이 볼 수 있도록 했다. 거기엔 유니콘의 뿔이 들어가면 딱 맞을 정도의 공간이 있었다.
“첨언하자면, 전 이게 포니가 만든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슴이 만든 것deerish 이겠죠.”
그녀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래리티를 바라보았다.
“자, 이 정도면 당신의 섬세한 감성에도 잘 맞지 않나요? 빨리요, 빨리 써 봐요.”
래리티는 혼 블레이드Horn-Blade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러나 곧 한 대 맞기라도 한 것처럼 홱 뒤로 물러섰다.
“싫어요!” 그녀는 떼쓰는 망아지마냥 징징댔다. “절대로! 싫어요!”
쉴드 메이든은 이를 악물며 조곤조곤 말했다.
“.......저는, 여러분들을 전원, 무장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제발 써주세요.”
“싫어요! 싫어! 싫다구!”
새하얀 유니콘은 줄기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난 절대로 내 뿔에 저걸 달지 않을 거야! 휘두르지도 않을 거고! 칼날 달린 뿔이라니.......꼭 무슨.......피에 찌든 미개한 야만마 같잖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당신은 내일 있을 싸움에서 죽고 말 거예요.”
흐린구름색의 노련한 전사가 말했다.
“그 혼란스런 전장 속에서 당신을 보호하면서 싸울 순 없어요! 최소한 스스로를 지킬 수는 있어야 한다구요!”
“난 아무것도 죽이기 싫어!”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요!?”
“나는! 패션! 디자이너란! 말이야!”
래리티는 울분을 토해내며 악을 써댔다. 공황상태에 빠진 그녀는 돌로 된 바닥을 앞발굽으로 미친 듯이 두드려댔다. 고상하게 빛나던 푸른 눈동자는 사라지고, 핏발이 선 채로 번들대는 안구만이 불안정하게 움찔댔다.
“난 드레스를 만들고, 팔았어! 드레스를!”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빛나는 절망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제발 나한테 죽이라고 하지 마! 제발! 난 못해! 못한다구! 못 죽여!”
애플잭이 무너진 래리티를 감싸려 다가왔다. 그러나 새하얀 유니콘은 친구의 위로마저 피하며 몸을 움츠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훌쩍댔다.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돌바닥을 적셨다.
레인보우 대시는 무력감에 휩싸였다. 래리티를 돕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지, 어떻게 해야 하는 지, 그녀로서는 무엇 하나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애플잭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도저히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러나 쉴드 메이든 만은 이 상황을 차분하게 받아들였다.
“.......그럼 당신은 여기에 왜 있는 거죠?”
래리티는 코를 훌쩍거렸다.
“왜냐하면.......왜냐면 내 친구가 다쳤으니까!”
그녀는 흐느끼면서도 말을 이어갔다.
“걔는 날 도우려다가 다쳤단 말야! 그러니까 내가 걔를, 걔를 구해야해! 설령 이런 끔찍한, 여행을 하게 되더라도! 그래도 상관없어! 난, 트와일라잇이 죽는 건 싫어!”
그녀는 구슬픈 울음을 터트렸다.
쉴드 메이든은 조심스럽게 래리티에게 다가갔다. 흐린구름색 발굽이 새하얀 유니콘의 지근거리까지 다가가, 절망으로 얼룩진 하얀 볼을 쓰다듬었다.
“쉿.......”
느긋한 숨소리가 유니콘의 불안정하던 호흡을 진정시켰다.
“쉬잇.......” 새잎처럼 보드라운 눈빛이 래리티를 응시했다.
“울지 말아요. 제가 비밀을 하나 얘기 해줄게요.”
눈물을 닦아주던 발굽이 래리티의 볼을 살포시 들어올렸다. 쉴드 메이든과 래리티의 시선이 마주쳤다.
“잘 들어봐요.”
래리티는 코를 요란하게 한 번 훌쩍인 뒤, 눈을 꾹 감았다 떴다. 호흡을 가다듬으려 애쓰는 유니콘을 보며, 쉴드 메이든은 모성이 깃든 웃음을 지었다.
“저도 피가 싫답니다. 정말 싫어해요. 대장도 피를 싫어해요. 경비대원들 모두가 마찬가지죠. 만약 피 튀기는 싸움을 즐기는 포니가 있다면, 그 포니는 절대로 길드데일 경비대가 될 수 없어요.”
쉴드 메이든은 래리티의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곤 자신의 이마를 새하얀 유니콘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우리는 포니에요. 늑대가 아니죠. 그리핀도, 드래곤도 아니지요. 우리는 다른 이들을 해치고 그들의 삶을 빼앗으면서 재미를 느끼는 종족이 아니에요.”
쉴드 메이든은 래리티에게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래리티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호흡을 그녀에게 맞췄다.
“하지만 이 대지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장소와 사랑하는 포니들을 파괴하려하는 난폭한 존재들이 있어요. 우리는 그들의 폭거에 맞서 스스로를 희생하죠. 때로는 혐오스럽고 역겨운 행동을 주저 없이 행하기도 하고, 목숨을 내놓기도 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쉴드 메이든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얼굴에 잔잔한 행복이 그려졌다.
“.......사랑받아 마땅한 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 “.......사랑받아 마땅한 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눈을 뜨고 래리티로부터 이마를 떨어뜨렸다. 녹색 눈동자가 푸른 눈동자의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친구를 사랑하시나요?”
래리티는 코를 훌쩍였다. “그 사랑이 어떤 의미냐에 따라-”
“그 분이 살아가고 있다는 게 당신을 행복하게 하나요?”
래리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맞아요. 전 그 애를 사랑해요.”
“그렇다면 그 친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믿으세요, 래리티 양. 그 사랑이 당신에게 길을 알려줄 거예요. 당신에게 용기를 줄 거예요. 그리고 여러분들 모두에게도 용기를 줄 거예요.”
쉴드 메이든은 애플잭과 레인보우 대시에게도 시선을 향하며 말했다. 대시는 붉어진 눈시울을 부릅뜨며 이를 악물고 있었다.
“사랑은 여러분이 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일들도 할 수 있게 해줘요. 믿어 보세요. 경험담이니까.”
래리티는 코를 훌쩍이며 발굽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곤 마법으로 혼 블레이드를 자신의 뿔에 가져다 끼웠다. 끈 조절은 하지 않았음에도, 그녀의 뿔은 혼 블레이드의 비어있던 아랫부분에 딱 맞게 들어갔다.
래리티는 혼 블레이드를 다시 뿔에서 빼냈다. 수월하게 벗겨졌다. 쓰고 있을 때 튼튼하게 고정되어 있던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잘 맞네요.”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양 여왕과 달 공주께 기도하건대, 부디 당신이 그걸 쓸 일이 없기를 바래요.”
쉴드 메이든이 말했다.
“하지만 만약 써야할 때가 온다면, 두려워하지 마세요.”
래리티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무섭고 싫어도 해야 되는 때가 있다.......요즘 들어 몇 번이나 배우고 있는 교훈이에요. 익숙해지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요.”
뻣뻣해진 목을 옆으로 기울이던 래리티의 시선이 쉴드 메이든의 하얀 갈기에 닿았다. 그것은 마치 목을 따라 넘실대는 하얀 파도처럼 보였다.
흐린구름색 어스 포니가 친밀하게 코를 비벼왔다. 그녀의 갈기가 래리티의 몸에 닿았다.
그 순간, 래리티는 형언할 수 없는 부드러움을 느꼈다.
“세상에, 쉴드 메이든. 당신의 갈기는 정말 멋지군요. 건강한 굵기에, 풍성한데다 윤기도 흘러요. 혹시 땋기도 해요?”
쉴드 메이든은 조금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가끔 시간이 나면요.” 그리고 그녀는 한 마디 덧붙였다. “.......전사에겐 사치일 뿐이죠. 저도 알-”
“그건 말도 안 돼요!”
포니빌 최고의 패션 포니가 거세게 반발했다.
“겉모습을 가꾸는 건 사랑하는 것들을 위해 싸우는 것만큼이나 중요해요! 조금 더 생각해보면, 그 둘은 꽤 비슷한 개념이랍니다. 믿어 보세요!”
새하얀 유니콘은 짐짓 악마적인 미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 마법에 익숙해보이진 않던데.......유니콘한테 머리 맡겨본 적 없죠?”
“없죠.”
“그럼 이 기회에 한 번 맡겨보시죠!” 래리티가 제안했다. “오늘 밤에 더 해야 할 일도 없잖아요?”
“당신까지 무장을 마치신다면, 오늘 제 임무는 그걸로 끝납니다.”
“그렇다면야, 전 이걸 고르죠.”
래리티는 혼 블레이드를 자신의 구부러진 보랏빛 꼬리털에 묶었다.
“제 무장은 이걸로 됐어요. 그럼 이제 소파랑 거울이 있는 곳으로 가요! 가서 우리의 일을 시작하도록 해요!”
그녀는 몸을 돌려 무기고에서 나간 뒤 경쾌한 걸음걸이로 중앙 회관으로 향했다.
쉴드 메이든은 빙그레 웃으며 두 이퀘스트리아 포니에게 물었다.
“두 분만 계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애플잭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예, 쉴드 메이든 양.”
그녀는 모자의 끄트머리를 잡고 앞으로 기울였다.
“여러모로, 고맙습니데이.”
“별말씀을요. 이런 이야기는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닌걸요. 레인보우 대시, 당신은 어떻죠?”
“최고야!”
레인보우 대시는 격렬하게 머리를 흔들어댔다.
“너 진짜 멋있더라!”
쉴드 메이든은 둘에게 목례를 한 뒤 무기고를 나섰다. 그녀는 래리티가 부르는 소리-“쉴드 메이든, 자기, 오고 있는 건가요?”-를 듣고 발굽을 재촉했다.
“내는 저 구름색 가스나가 맘에 든데이.”
애플잭이 웃으며 말했다. 그녀와 레인보우 대시는 함께 경사로를 올랐다.
중앙 회관에 도착한 두 이퀘스트리아 포니는 거대한 화로를 중심으로 모여있는 길드데일 포니들을 발견했다.
“나는 저기 가서 좀 누워있을래.” 대시가 말했다.
“내는 좀 밖에 나가서 돌아다녀 볼란다. 허락만 받는다면 말이제.”
애플잭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성이 당최 어디 위에 지어진 건지, 좀 더 알고 싶어서 말이제. 밖에 뭐가 있는지도 궁금하기도 허고.”
오렌지 색 어스포니는 어스름해진 회관을 총총대며 나아갔다. 푸른 페가수스는 중앙 화로로 걸음을 옮겼다.
화로 주위에 모여 있던 어스 포니들의 이목이 레인보우 대시에게 집중되었다.
“빈 자리 좀 있을까?” 대시가 물었다.
얼룩진 주황색의 포니가 몸을 움직여 자신의 오른쪽에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대시는 망설임 없이 그 자리에 앉았다. 그 곳은 길드데일 포니들의 한가운데 즈음이었다. 다양한 흙색조의 털색들 사이에 낀 푸른 파스텔 톤의 털색은 아무래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몇 분간 침묵이 흐른 뒤, 밤색의 포니가 불쑥 물었다.
“다른 페가수스들도 다 당신 같아요?”
대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떤 식으로 대답해줘야 한담.......? 고심하던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굴기로 결정했다.
“모든 페가소스들이 날 수 있긴 하지.”
대시는 딴엔 정중하게 말했다.
“하지만 모든 페가소스들이 나만큼 빠르거나 쿨 하지는 않아.”
“쿨?” 밤색 포니는 고개를 갸웃댔다. “그 ‘쿨’이라는 게 뭐죠?”
“그게 무슨 말이냐면.......음.......”
푸른 페가수스는 쿨한 대답을 내놓기 위해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다.
“다른 포니가 아닌, 바로 ‘너’가 최선을 다한 일이라면 엄청 멋진 성과가 나온다는 사실을, 다른 포니들이 널 보기만 해도 안다는 거야!”
“아-하.”
“그럼 언니는 다른 평범한 페가수스들보다 얼마나 더 쿨해요?” 이번엔 크림색 망아지가 물었다.
“글쎄.......”
푸른 페가수스는 또 다시 머리를 굴려댔다.
“평균적인 페가소스들은.......나에 비하면 80프로만큼 쿨하달까.......? 그니까 난 걔들보다 20프로 더 쿨하다는 거지.”
그녀는 수학에 약했다.
<그녀는 수학에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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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잭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쉽게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거대한 출입문을 여는 것은 제법 힘든 일이긴 했지만, 경비들과 마주치는 것에 비하면 쉬운 일이었다.
즉, 입구엔 경비조차 없었다.
드높이 떠오른 달이 그라제첼트와 그 주변을 찬란한 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애플잭은 먼 곳을 내다보았다. 바람을 타고 번지는 은빛 파문이 시야에 가득 채워졌다. 그녀가 지금껏 보아온 길드데일의 모습처럼, 아름다운만큼 사무치게 외로운 풍경이었다.
이 풍경 속의 주민들이 높은 수준의 문명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애플잭은 이 대지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비록 이 곳, 그라체첼트 요새까지 와서야 ‘높은 수준의 문명’을 실감할 수 있었지만.
기반암 위를 거닐던 애플잭은 작은 정원을 발견했다. 정원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식물들은 줄에 맞춰 구분되어 있었고, 버팀목이 필요한 식물들 옆에는 작은 사다리가 하나씩 꽂혀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바닥에 댄 채 식물들의 냄새를 맡았다.
아이고, 마, 코 따가버라, 이기 먼 냄새더라? 많이 맡아봤는디.......
“허브다.”
누군가 귀띔했다.
애플잭은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애쉬테일이 서 있었다.
“전부 의료용이지. 이 근방에선 들판을 사용할 수가 없어서 여기서 기른다. 허브란 게 원체 발굽이 많이 가는 작물이기도 하고.”
애플잭은 웃으며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는 긴데, 당신네들은 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섬세한 포니들이었네예.”
그녀는 한 마디 덧붙였다.
“처음 여기 왔을 적엔 엄청 불안했심더.”
애쉬테일은 애플잭을 지나쳐 걸었다. 애플잭은 그를 따라 발굽을 움직였다.
“나는 이퀘스트리아에 가본 적이 없다.”
애쉬테일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 나라에는.......‘도시’ 라는 게 있다지? 건물도 많고, 모두들 모여서 사는 장소라고 하더군.”
“도시야 많이 있지예. 큰 도시, 작은 도시, 작은 마을, 큰 성.......아주 종합선물세트 마냥 다 있습니데이.”
검붉은 색 어스 포니는 들판 너머를 응시했다.
“언젠가 꼭 한 번 보고 싶다.”
“안될 게 뭐가 있겠습니꺼? 우리는 당신네들처럼-어흠, 이게 아이라, 여튼, 이퀘스트리아는 다른 나라 여행객들이 못 오게 하진 않습니데이. 혹시 당신네들이 길드데일을 떠나는 게 금지되어있다믄야, 얘기가 좀 다르겠지만예.”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는 않다. 다만 군주 해머 후프께서 명령하시길, 그것은 도의적 관점에서 생각해야 된다고 하셨지.”
애쉬테일은 애플잭을 곁눈질했다.
“우리는 이퀘스트리아 포니들이 길드데일로 여행하러 오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상황이 이럴진대 정작 우리는 원하는 대로 이퀘스트리아에 여행하러 갈 수 있다면 그 꼴이 뭐가 되겠는가? 명백한 위선이다.”
“아무래도 여행에 관한 법부터 좀 바뀌어야지 않겠나 싶은데예.”
애플잭이 제안했다.
“그건 내 소관이 아니다.”
애쉬테일은 애플잭의 의견을 일축했다.
“여행법에 관해선 전에 거론된 적이 있었지. 그러나 군주 해머 후프께서는 '현명'하시다. 이미 오랜 세월동안 우릴 잘 다스리고 계시지. 그의 결정에 의문을 표하는 자들은 거의 없다. 거의, 없지.”
파란 눈동자가 무언가를 쏘아보듯 가늘게 떠졌다.
“다만, 현명함을 고집한다는 게 진정으로 현명한 것인지는 모르겠군.”
오렌지 색 어스 포니는 바닥에 털썩 앉았다. 약간 주저하긴 했지만, 애쉬테일도 그녀의 옆에 앉았다.
“애쉬테일, 당신은 원수이자 대장으로 잘 해나가고 있는 것 같은데예. 군주님께 직접 말씀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꺼? 당신 말이라믄 분명 들어주실 겁니데이.”
“그럴 수.......없다. 나로는 그를 바로잡을 수 없다.”
애쉬테일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힘이 빠져 있었다.
애플잭은 단박에 그 이상(異狀)을 알아차렸다.
애플블룸이 뭔가 잘못했을 때, 내가 갸를 다그치다 보면 갸가 저런 식으로.......주눅 들어 했었제.
그녀의 머릿속에서 비로소 퍼즐이 맞춰졌다.
거기다 아까 봤던 애쉬테일의 큐티마크.......애쉬테일의 재능을 보여주는 그 문양이 길드데일의 국가 문양하고 같은 모양이라믄.......
“군주 해머 후프는.......당신 아부지 아입니꺼? 맞지예?”
애쉬테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나를 왕자로서 대우하도록 허락한 적이 없다.”
-
본성 2층의 왼쪽 방향 6번째 방에 쉴드 메이든이 있었다. 그녀는 풀로 채워진 거친 천 매트리스 위에 누워있었다. 그 근처에는 거울이 공중에 띄워져 있었다. 이제 막 하얀 갈기의 마지막 한 다발이 땋여지고 있는 참이었다.
몇 분 후, 래리티가 외쳤다.
“다 됐답니다!”
그녀는 마법을 이용해 거울을 기울여 가까이 가져왔다. 흐린구름색 포니로 하여금 여섯 갈래로 땋여진 갈기를 좀 더 잘 볼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함이었다.
“어때요?”
쉴드 메이든은 활짝 웃었다.
“너무 예뻐요!”
그녀는 땋아진 갈기를 발굽으로 매만지며 감탄했다.
“제가 했을 때보다 훨씬 튼튼하게 잘 땋아졌네요.”
“말 그대로, ‘마법’이니까요, 자기.”
래리티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모두 제 공이라고만은 할 수가 없겠네요. 당신 갈기가 워낙에 상태가 좋아서 말이죠! 샴푸를 쓰는 것도 아닌데! 이건 패션미용계의 기적이라구요!”
“후훗, 제 딸이 엄청 좋아하겠네요.”
래리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딸이 있어요?
“그럼요!” 쉴드 메이든이 힘차게 대답했다. “보여드릴게요. 잠시만 있어 보세요!” 그녀는 벌떡 일어나 방을 빠져나갔다.
래리티는 얌전히 앉아 쉴드 메이든을 기다렸다. 그러나 속내는 평화롭지 못했다.
쉴드 메이든한테 딸이 있다고?
그녀는 예고없이 접하게 된 정보를 곱씹으며 혼란에 빠졌다.
그렇게 어려보이는데!?
하지만 조금 전에 봤던 쉴드 메이든의 의연하고 다정한 태도를 생각해보면, 아주 납득이 안 될 문제도 아니었다.
난 비겁한 겁쟁이처럼 굴었는데, 쉴드 메이든은.......
흐린구름색 포니가 초록색 눈동자를 빛내며 돌아왔다. 입에는 접힌 종이 한 장이 물려 있었다
.
“응? 그거 혹시 그림인가요?” 래리티는 고개를 갸웃댔다. “사진을 가져오실 거라 생각했었는데요.”
“사진? 그게 뭔가요?” 쉴드 메이든이 되물었다.
“어음.......말로 설명하려니 좀 복잡하네요.” 래리티는 슬쩍 대답을 피했다. “어쨌든, 잘 그려진 그림이길 바래요.”
“물론이죠! 최고로 잘 그려졌다구요!”
쉴드 메이든은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그녀는 전에 없이 신이 나 있었다.
“남부 구역의 그라스라이겐Grasreichen 요새에 사는 제 친구가 숯으로 그려준 거예요. 걔는 화가예요. 제가 아는 포니들 중에서 가장 그림을 잘 그리죠. 자, 보세요!”
쉴드 메이든은 종이를 펼쳤다. 스핏 컬spit-curl 스타일의 갈기와 빙빙 꼬인 꼬리털을 가진 작은 망아지가 굵은 검은색 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 망아지의 털가죽은 밝은 회색이었고 갈기와 꼬리털은 진한 회색이었다. 반면에 눈동자만큼은 찬란한 오렌지색이었다.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쉴드 메이든이 북받쳐 하며 말했다.
“사랑스러운 아이네요.” 래리티가 맞장구쳤다. “제 여동생과 비슷한 나이일 것 같아요.”
“여동생이 있으셨군요?”
쉴드 메이든은 새하얀 유니콘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이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아무래도 우리 동갑인 것 같지 않아요?”
“우리가 동갑이라구요? 쉴드 메이든, 당신 몇 년도에 태어났죠?”
래리티가 묻자, 쉴드 메이든은 흔쾌히 대답을 내놓았다. 진실은 곧바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길드데일의 날짜 세는 법이 이퀘스트리아의 방식과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판이하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들은 곧 서로가 한 달 간격을 두고 태어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셀레스티아님 맙소사, 정말 그렇네요!”
“참 재밌는 일이군요.”
“네.......맞아요.”
래리티는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대답했다. 사실 그녀는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한 감정을, 가장 가까운 단어로 치환하자면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쉴드 메이든은 나랑 동갑인데, 벌써 딸이 있는 거야? 아마 남편도 있겠지? 길드데일에선 원래 이렇게 빨리 결혼하나? 하긴, 길드데일은 여러모로 안정되어있다는 느낌은 아니었어. 이 곳의 포니들은 빨리 성숙해질 수밖에 없는 거겠지.......아니면,
래리티의 ‘슬픔’에 씁쓸함이 더해졌다.
내가 나이를 먹어버린 걸지도 몰라. 내가 의식하지도 못한 새에 말이지.
“어쨌든, 그럼 아이 아버지는 누구죠?”
“오늘 만났을 거예요. 아니면 봤거나. 그 이는-”
그 때, 코마가의 하울링이 두 암말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두꺼운 나무 벽에 막혀 기세가 한 풀 꺾이긴 했지만, 그 소리는 여전히 거칠고 사나웠다. 등골이 오싹해진 래리티는 온몸을 움찔거렸다.
쉴드 메이든의 안색이 굳어졌다.
“멀지 않은 거리네요.”
“저것들.......여기까지 들어오진 못하겠죠? 그렇죠?”
쉴드 메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들이 관문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진 않더군요. 일단 관문이 닫히고 나면, 녀석들은 그라제첼트의 기반암을 그저.......오르기엔 너무 높고 단단한 돌벽 정도로 봅니다. 지금껏 그 돌벽을 올라보겠답시고 나선 녀석은 한 놈도 없어요.”
-
“멀지 않은 거리다.” 애쉬테일이 중얼거렸다.
그와 애플잭은 자리에서 일어서 있었다. 파란 눈동자가 차가운 달빛에 덮인 들판을 샅샅이 살폈다.
“여기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근디.......갸들은 도대체 정체가 뭡니꺼?” 애플잭이 물었다.
애쉬테일의 시선이 애플잭을 향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들은 한 때 드래곤이었다.”
그는 찬찬히 이야기를 꺼냈다.
“아주 오래 전, 세상만물이 막 시작되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그들은 어떤 끔찍한 죄를 저질렀다는군. 그 벌로서, 용신(龍神)은 그들의 날개와 불을 빼앗고 지상을 떠돌도록 했다. 그렇게 영겁의 시간동안 계속된 방랑은 그들의 마음마저 빼앗아, 종막에는 욕망만이 남은 짐승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애플잭은 눈썹을 아치 모양으로 치켜 올렸다.
“전설이라.......그기 답니꺼?”
“이게 다다.”
애쉬테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우리는 코마가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 매해 봄이 되면, 녀석들은 약 한 달간 남에서 북으로 길드데일을 가로질러 달린다. 녀석들이 어디서 오는 지, 어디로 가는 지, 왜 매년 봄마다 연례행사처럼 여행을 떠나는 지, 봄마다 가는데 돌아오는 모습은 안 보이는지.......아무것도 모른다. 우리가 아는 거라곤 그 크고, 멍청하고, 잔인한 녀석들이 매년 봄마다 우리의 들판을 질주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길목에 있는 모든 걸, 심지어 포니도 찢어발기며 전진한다는 것이다.”
매년 한 달 동안 한 나라의 남에서 북으로 달리면서, 마주치는 모든 걸 완전히 부숴버린다믄야, 이건 뭐, 거의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기라.......
“아, 여러분네 나라에 도시가 없는 기 갸들 때문이었는갑네예. 도시를 만들기 싫었던 기 아이라, 만들 수가 없었던 거 아임니꺼?”
애쉬테일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캐서, 갸들 크기는 얼마나 됩니꺼?”
“평균적인 길더스보다 적어도 10배는 크다. 정말 엄청나게 크지. 직접 보기 전까지는 크기를 실감할 수가 없을 거다.”
“갸들이 글케 크면은, 여러분네는 어떻게 싸웁니꺼?”
애쉬테일은 사납게 웃어보였다.
“우린 녀석들보다 똑똑하지. 게다가 더 빠르고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우리에겐 무기도 있다. 녀석들은 없지. 그리고,”
그는 자랑스럽게 고개를 치켜세웠다.
“우린 금강불괴Stand Firm가 될 수 있다.”
“.......?”
말문이 막힌 애플잭은 그저 두 눈만 몇 번 끔뻑댔다.
“못 들었는가?”
애쉬테일이 재차 말했다.
“금강불괴가 될 수 있다.”
애플잭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전의 애플잭이 그랬듯, 이번엔 애쉬테일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설마 이게 무슨 뜻인지.......모르는가?”
< “설마 이게 무슨 뜻인지.......모르는가?”>
“어.......음.......”
애쉬테일은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정말 믿을 수가 없군. 그대는 여기선 금지된 온갖 마법들을 이퀘스트리아에서 다 겪어봤을 텐데, 정작 여기서도 통용되는 단 하나의 마법에 대해서는 모른다니! 이건 모든 어스 포니들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란 말이다!”
“고것이.......”
애플잭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일단 어스 포니들이 힘이 세다는 건 지도 압니더. 지도 그건 음청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더! 그리고 대지와 함께 하는 일들도 잘하지예. 식물을 심는-”
“그리고 금강불괴가 될 수 있다.”
애쉬테일은 도합 세 번째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대지에 발굽을 묻고 똑바로 서면, 어스 포니들은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절대로 부수어지지 않는 금강불괴의 몸을 갖게 되지. 어머니 대지로부터 힘을 받고, 그 힘으로 적들에 맞서는 것이다. 생각해봐라. 산이 태풍이나 눈보라 따위에 부서지던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전투에서 무너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애플잭의 눈이 휘둥그레 하게 떠졌다.
“그기 참말입니꺼? 내는 여태 살면서 그런 기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데이!”
애쉬테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주겠다. 그대는 힘이 세다고 했지?”
“엄청 세지예!”
그라제첼트의 기반암 위에는 흙이 많지는 않았다. 애쉬테일은 할 수 있는 만큼만 흙을 파내고는 그 사이에 발굽을 밀어 넣었다.
“날 밀어서 넘어뜨려 봐라.”
이기 만약 미친 소리면 우짜노?
애플잭은 머뭇거렸다. 그녀는 애쉬테일을 믿긴 했지만, 전적으로 완전히 신뢰하느냐고 묻는다면 차마 긍정할 자신은 없었다.
애플잭은 제자리에서 뒷다리를 들고는 애쉬테일을 밀었다. 하지만 어찌나 약하게 밀었던지 도리어 그녀가 더 밀려나고 말았다.
“다시! 더 세게!” 애쉬테일이 다그쳤다.
애플잭은 뒤로 몇 발굽 물러섰다. 그리고 지면을 뒷발굽으로 누르며 힘을 모으다가 앞발굽을 앞으로 들이밀었다.
그러나 튕겨 나간 건 오히려 애플잭이었다. 그녀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뒷다리를 사용해라!”
애플잭은 앞다리로 몸무게를 지탱하며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그녀는 애플벅 시즌을 생각했다........
아니제. 더 힘 줄 수 있다 아이가.
사실 애플벅 시즌이든 언제든, 그녀의 뒷발차기는 전력이 아니었다. 일정 수준 이상으로 힘을 주면 사과나무가 박살나 버리기 때문이었다.
이 날 밤 애플잭은, 삶에서 처음으로, 온힘을 담은 뒷발차기를 날렸다.
애플잭의 뒷발굽이 애쉬테일의 옆구리를 때렸다. 그 순간 그녀는 그대로 공중으로 튕겨져 나갔다. 포물선을 그리며 땅으로 떨어진 오렌지 색 몸뚱이는 두 바퀴를 더 굴러가고 나서야 멈췄다.
한 박자 늦은 어지럼증이 후폭풍처럼 밀려들었다. 땅이 빙빙 돌아대는 것 같았다.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힘들었다.
그에 반해 애쉬테일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느껴지지도 않는군. 그게 그대의 최선인가?”
그는 코웃음을 치며 애플잭을 바라보았다.
애플잭은 이를 악물며 씩씩댔지만, 도발에 넘어가지는 않았다. 어쨌든 애쉬테일의 말이 옳았음을 지금 막 온몸으로 배운 참이었으니까.
“금강불괴라캤지예. 거 어스 포니들은 다 할 수 있는 겁니꺼?”
애플잭은 몸을 추스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적어도 길더스는 모두 할 수 있다. 이퀘스트리아의 어스 포니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우리도 분명 할 수 있을 낍니더! 좀 가르쳐주이소!”
애쉬테일은 애플잭을 위 아래로 슬쩍 훑어보았다.
“영 모르겠는데.......그대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애플잭은 짓궂게 웃어보였다.
“기억 안 나십니꺼? 지가 고개 디밀면서 소리 함 빽 치니께, 울 애쉬테일 대장님이가 까-암짝 놀래가꼬 눈 좀 깜빡댔다 아입니꺼?”
“.......그냥 갑자기 눈이 간지러워져서 그랬던 거다.”
“예, 예. 물론 그랬겠지예. 왜 아이겠심꺼?”
“그대는 금강불괴를 시전하기에 충분한 영혼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지.”
애쉬테일은 화제를 돌렸다.
“금강불괴는 그 영혼의 힘을 실체화하는 것이다. 영혼이 가진 힘을 다리에 부여하는 것이지.”
이 때 애플잭은 이미 발굽을 흙 속에 파 넣고 있었다.
“배울 준비 다 됐심더.”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아름다운 밤이지 않습니꺼? 달빛도 퍽 밝고예.”
“과연 그렇군.”
검붉은 색 어스 포니는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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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8.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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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gerous Business~Saga > [1부] It's a DB, GOYD.'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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