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16.
Written by. Jetfire2012
Translated by. BlackS
래리티의 뿔이 반짝이고, 찻잔이 밑받침에서 떠올라 입술에 닿았다. 새하얀 유니콘은 우아하게 차를 홀짝였다. 그녀는 티 한 점 없이 말끔한 흰 식탁보와 연분홍빛의 냅킨들, 빛나는 은수저 그리고 따스한 봄의 향기를 만끽했다.
“그, 쓰-꼰 쪼끔만 주시면 안 되여?”
왼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래리티는 아주 어린 유니콘 망아지를 발견했다.
아직 젖살도 채 빠지지 않은 통통한 아이였다. 하얀 엉덩이에는 큐티마크조차 없었고, 머리가 작아서인지 푸른 눈망울이 유난히 더 커 보였다. 다만 보라색 갈기와 꼬리만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단정히 구부러져 있었다. 아이의 작은 몸에 비하면 많이 커 보이기는 했지만.
“그럼, 왜 안 되겠니.”
래리티는 스콘이 담긴 중국식 꽃무늬 접시를 마법으로 건넸다.
“친애하는 숙녀 분, 제 잔 좀 채워주시겠어요? 그리고 오렌지 조각도 좀 부탁드려요.”
이번엔 오른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래리티는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굉장히 나이를 먹은 것 같은 늙은 유니콘이 보였다.
한때 새하얬을 털빛은 조금 색이 바래보였지만, 여전히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털가죽 아래의 육신은 나이든 생물체들이라면 피할 수 없는 세월에 잠식돼 퍽 야위어 보였다. 깊고 푸른 눈동자 주변에는 잔주름이 자글자글했다. 갈기와 꼬리는 약간 수수한 보라색이었는데, 둘 모두 한 줄씩 하얗게 세어 있었다. 얼굴엔 수정테의 코안경이 씌워져 있었고, 수정 목걸이가 목에 걸려 있었다. 양 쪽 엉덩이에 있는 보석 세 개가 그려진 큐티마크는 여전히 반짝였다.
“어머, 그럼요, 물론이죠.”
래리티의 뿔이 다시 반짝였다. 찻주전자가 늙은 유니콘의 컵 위로 떠올라, 따뜻한 갈색 액체를 조심스레 따랐다. 참방대며 컵에 부어진 액체에서 희뿌연 김이 피어올랐다.
“자기, 아무래도 난 샌드위치가 좋을 것 같아.”
정면에서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래리티는 건너편에 앉아있는 커다란 암말에게 시선을 향했다.
암말의 길쭉한 다리와 우아한 풍채는 다른 포니들의 의자보다 더 큰 의자를 필요로 했다. 벨벳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털은 굉장히 새하얬고, 이따금씩 눈이 부시게 반짝거렸다. 선명하고 짙은 보라색의 갈기와 꼬리는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봄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살랑대는 방울꽃 같은 소리를 내며 흔들거렸다. 머리 위에 솟은 길고 날카로운 뿔 아래, 기품 있는 콧잔등 위엔 래리티를 부드럽게 바라보는 진한 푸른색 눈동자가 있었다. 생기 있게 타오르는 무언가를 깊숙한 데에 품고 있는 그것은 하나의 별처럼 보이기도 했다. 몸통 양 쪽 측면엔 곱고 섬세한 한 쌍의 커다란 나비 날개가 접혀 있었는데, 그것은 영롱한 무지갯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의 목에는 래리티가 모르는 문자들이 물 흐르듯 적혀있는 수정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양 쪽 엉덩이에는 마름모에서 삼각형으로 모양이 바뀐 보석들이 그려져 있었다. 각 보석들의 가운데에는 보라색의 별모양 광채도 추가되어 있었다.
“여기 있어요.”
래리티는 오이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를 마법으로 건넸다.
네 포니들은 잠시 동안 티타임을 즐기며 평온한 침묵의 한 때를 보냈다.
제일 먼저 찻잔을 비운 건 래리티였다.
“실례가 안 된다면, 여러분들이 누구신지 여쭈어도 될까요?”
반 쯤 먹은 스콘을 내려놓으며, 어린 망아지가 답했다. “나눈 과거의 너였쪄.”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늙은 암말이 말했다. “나는 미래의 너란다.”
“그럼 그 쪽 분은?”
래리티는 커다란 나비 날개를 단 유니콘에게 물었다.
샌드위치를 내려놓으며, 나비 날개의 유니콘이 말했다. “나는 네 안에 있는 무언가야.”
“그건 너무 선문답 같네요.”
<"그건 너무 선문답 같네요.">
래리티가 말했다.
“여기 계시는 과거 양Miss Past과 미래 부인Madam Future하곤 비교도 안 되게 어려워요.”
나비 날개의 유니콘은 빙그레 웃었다.
“나는 그들이기도 하지. 너였기도 하고, 너이기도 하고, 너가 될 것이기도 해. 자기, 나는 완전히 개화된 너야. 콜테스토텔레스Coltestotles의 표현을 빌리자면, 종자였던 잠재력이 꽃을 피워 실제가 된 거지.”
“내가 당신처럼 될 수도 있는 거군요.”
“내가 바로 너, 그 자체야. 네 안에 있는 것들이 모두 발현되었을 때 너한테 일어나는 일. 그게 ‘나’야.”
“이해가 안 돼요.”
래리티는 주눅 든 채로 웅얼거렸다.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더 명확한 설명을 원한다면, 뒤를 돌아보길 권할게.”
래리티는 그 말에 따랐다. 지평선에서 어둡고 방대한 무언가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길었고, 역시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드넓었다. 하늘을 뒤덮고 태양을 가리는 길디 긴 목 위에 거대한 머리가 있었다. 그것은, 갑자기 그녀를 향해-
-
“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래리티는 이부자리에서 튕겨지듯 몸을 일으켰다. 수정 천장이 그녀가 머리를 박지 않을 정도로 높은 데 있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대기 중의 짙은 마력 탓에 여전히 뿔이 따끔거렸다.
꿈이야. 꿈일 뿐이야.
새하얀 유니콘은 심호흡을 하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리고 제법 재밌는 꿈이기도 했지.
래리티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곯아떨어져 있는 애플잭과 레인보우 대시가 보였다. 애플잭은 부드럽게 코를 골고 있었고, 레인보우 대시는 제 몸을 비단 시트로 돌돌 말아 감싼 채였다.
이부자리에서 꾸물대며 빠져나온 뒤, 래리티는 방의 입구에 쳐진 커튼으로 기어갔다. 그리곤 커튼과 바닥 사이의 틈새를 슬쩍 들여다보았다.
공간의 밝기는 몇 시간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드높은 곳에 총총히 떠 있는 금빛 광점들이 변함없이 나무들을 밝히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래리티는 아직 해가 뜨려면 멀었으리라고 직감했다.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몸이 가뿐했다. 최소한 피곤하지는 않았다. 아마 대기 중의 짙은 마력 덕분일 것이라고 래리티는 생각했다. 이전에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말해준 적이 있었다. 유니콘들의 마법 회로는 흡수한 마력 중 수용량을 초과하는 잉여 마력을 사용해 몸과 마음을 회복시킨다고.
이유야 어찌됐든 간에, 래리티는 굳이 다시 잠을 청하진 않기로 했다. 잠이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숨소리까지 억누르며, 래리티는 조심스레 커튼을 들춰냈다. 그리곤 무릎을 굽혔다가, 그리 멀지 않은 지면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이 충동적인 일탈 행위에 대해선 그녀도 어찌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이번 여행에서 이미 돌아다닐 만큼 충분히 돌아다니고 있음에도, 왜 이런 식으로 더 쏘다니려 하는 것인지 당최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방금 꿨던 꿈은 여전히 래리티의 마음을 술렁이게 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나왔던 그 커다란 그림자는 뭐였을까? 아니, 그것도 그렇지만, 그 커다란 날개가 달린 유니콘은 뭐였을까?
과거와 미래의 자신에 대해선 이해하기 쉬웠지만, 나비 날개가 달린 그 암말의 정체는 모호하기만 했다.
완전히 개화된 나라고? 그게 무슨 뜻이지?
래리티는 숙소가 있는 지역의 경계선에 도달했다. 눈앞에 빽빽하게 서있는 나무들이 발굽을 멈칫거리게 했으나, 그녀의 머리 위편에선 금빛 광점이 자신을 잊지 말라는 듯 반짝거렸다.
오른편에서 부드러운 마법의 기척이 느껴졌다. 새하얀 유니콘은 거기에 이끌려 숲 안으로 몸을 들였다. 복잡한 통로들로 이어진 높은 나뭇가지들, 그 나뭇가지들이 달린 거대한 오크나무들의 몸통 줄기가 그녀를 마중했고, 맞이한 즉시 떠나보냈다.
그러던 차에, 래리티의 키보다 조금 높은 곳에 매달린 나뭇가지들이 하나 둘씩 불쑥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가지들은 그녀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급격히 우거지더니, 이내 팔라라우리아의 탑으로 이어지는 낮은 터널 같은 모양새를 갖췄다.
래리티의 뿔이 맥동했다. 강대한 마력이 전방에 존재한다는 신호였다. 터널의 끝이 가까워질수록, 그녀는 다리에 힘을 빼며 발굽 소리를 죽였다.
터널을 빠져나오자, 그 곳엔 광활한 빈 터가 있었다. 위쪽엔 드높이 치솟은 나뭇가지들이 지붕처럼 얽혀있었다. 래리티가 발굽을 내디딜 때마다 연한 황금빛 풀들이 눌렸다 펴지며 바스락거렸다. 그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적당한 크기의 호수가 있었다. 은색 거울 같은 그것은 황금빛 색채로 도금된 주변 풍경에서 유독 돋보였다.
래리티는 호수의 물에서 마법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 마법은 아지랑이처럼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머, 누가 있나봐!
빈 터와 숲 사이를 가르는 덤불과 관목들이 그녀의 왼편에 있었다. 래리티는 곧장 그 안으로 뛰어들어 몸을 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쪽 먼 곳에 있는 호수 기슭에서 두 사슴이 모습을 드러냈다. 둘 모두 칙칙한 회색빛의 뿔을 갖고 있었다. 그 중 더 가늘고 좁은 뿔을 가진 쪽은 확연히 암사슴처럼 보였고, 반면에 각진 얼굴과 근육질의 몸을 가진 쪽은 수사슴이 분명했다.
래리티의 시선을 잡아끈 건 암사슴 쪽에 있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암사슴의 둔부 부근에 매달린 바구니였다. 그 바구니의 고리버들로 된 테두리에, 아주 작은 삼각형 모양의 머리가 삐죽이 나와 걸쳐져 있었다. 생후 일주일이나 됐을까 싶을 정도로 어려보이는 새끼 사슴이었다.
한 쌍의 성체 사슴들은 호숫가에 멈춰 섰다. 암사슴의 뿔이 반짝였고, 그녀의 옆구리에 걸려 있던 바구니가 땅에 놓아지더니 천천히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러자 그 안에서 새끼 사슴이 가느다란 다리로 기어 나와서는, 기를 쓰고 바동댄 끝에 제 발굽으로 땅을 딛고 일어섰다. 아이는 몇 발굽 불안정한 걸음을 이어가다가 고꾸라졌다. 암사슴의 얼굴은 모성애 외엔 표현할 길이 없는 감정으로 가득했다.
어미와 자식은 새하얀 관찰마(馬)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래리티는 일순간 사슴 가족이 자신을 발견할까봐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걱정은 곧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나무들 틈에서 그녀가 익히 아는 사슴 : 팔라라우리아가 나타났다. 금빛 사슴 군주의 머리엔 은 서클렛이 씌워져 있었으나, 뿔은 위풍당당한 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군주가 다가오자, 부모 사슴들은 몸을 깊이 낮췄다. 금빛 암사슴도 마주 고개를 숙였다. 세 성체 사슴들은 잠시 제자리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중 새끼 사슴만은 그러거나 말거나 저 혼자 일어서다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결국엔 그냥 퍼질러 앉은 채로, 새로 온 거대한 방문객에게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팔라라우리아는 그 어린 사슴에게 고개를 낮췄다. 그리곤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아이와 코를 맞댄 뒤, 조심스럽게 킁킁거렸다. 다시 고개를 든 그녀는 부모 사슴에게 뭐라 뭐라 몇 마디 말을 건넸다.
래리티는 그들의 대화에 무의식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곧 자신의 행동에 회의감을 느끼고 그만두었다.
잘 들으려고 해봐야 뭘 한담. 어차피 내가 모르는 말일 텐데.
팔라라우리아의 말이 끝나자, 부모 사슴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내놓았다. 그리곤 몸을 돌려 십여 걸음 쯤 뒤로 물러났다.
팔라라우리아는 왼편으로 몸을 돌려 호숫가로 몇 걸음 다가갔다. 그녀는 머리를 숙이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 왼쪽 뿔이 호수에 완전히 담기게 했다.
이윽고 사슴 군주는 다시 머리를 들었다. 젖은 왼쪽 뿔에서 호수의 물방울들이 성스러운 안개비처럼 흩뿌려졌다. 그녀는 자신의 그림자의 품에 어린 사슴이 폭 안길 때까지 가까이 다가서곤, 젖은 뿔을 그 위에 기울였다. 물방울들이 작달막한 사슴에게 떨어져 내렸다.
그 다음 팔라라우리아는 어린 사슴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걸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젖은 뿔은 계속 어린 사슴에게 기울인 채였다. 어린 사슴의 작은 몸뚱이는 흘러내리는 물방울들로 완전히 적셔졌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젖어있던 왼쪽 뿔에서 빛이 반짝이자, 묻어있던 모든 물기가 일시에 사라졌다. 금빛 암사슴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인 어린 사슴에게 고개를 숙였다. 티 없이 맑고 큰 눈이 무수한 별이 떠 있는 밤하늘을 응시하더니, 작은 머리를 들어 금빛 암사슴과 코를 맞댔다. 금빛 암사슴 : 사슴 군주는 어린 사슴의 양 볼을 한 번 씩 핥아준 뒤, 뿔조차 자라지 않은 머리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어머, 이거 혹시 성스럽고 사적인, 그런 의식 같은 거 아닐까? 세상에! 그런 걸 함부로 훔쳐보다니! 나라는 포니가, 이 래리티가 어떻게 그런 짓을!.......
.......라는 생각이 래리티의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즉시 자리를 떠야겠다고 결심했지만, 막상 떠나려니 무슨 소리라도 날까 두려워 미동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 사이 부모 사슴은 어느새 자식 곁으로 돌아와 있었다. 팔라라우리아는 고개를 들고 그들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수사슴이 대답했고, 암사슴도 이어서 대답했다. 그 뒤 그녀는 팔라라우리아가 했던 것처럼 자식의 양 볼을 한 번씩 핥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 다음엔 수사슴도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부모 사슴은 다시 금빛 암사슴에게 시선을 돌렸고, 금빛 암사슴은 고개를 끄덕였다. 흰꼬리사슴 부부는 동시에 몸을 낮추며 예를 표했다.
부부 사슴은 몸을 일으켰다. 그 중 암사슴의 뿔이 옅은 주황빛으로 반짝이더니, 새끼 사슴이 다시 바구니에 담아졌다. 그 바구니는 옅은 주황빛에 감싸인 채 어미의 둔부에 메어졌다. 팔라라우리아는 몸을 돌려 사슴 가족으로부터 걸음을 옮겼고, 부부 사슴은 오른편으로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떠났다. 그들은 나무 사이로 걸어가 이내 모습을 감췄다.
팔라라우리아는 래리티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 오고 있었다. 새하얀 유니콘은 이제 완전히 초조함에 집어 삼켜졌다.
폐하께서 날 보셨을까? 강대한 마력에, 어우, 이런. 그러고 보니 천리안까지 가진 분이셨지.
래리티는 팔라라우리아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재빨리 투명화 마법을 시전했다.
잘 시전 됐을지 모르겠지만, 안 하는 것보단 나을 거야. 최소한, 내가 있는 쪽을 똑바로 보시지만 않는다면 모르실 거야.......아마도.
그 때, 어떤 선율이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팔라라우리아의 노래였다. 금빛 암사슴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그 자체로서 악기처럼 운율을 빚어냈다.
팔라라우리아는 예의 그 물 흐르는 것 같은 억양의 언어로 노래했다. 그녀의 입술에서 읊어지는 가사는 우아한 곡조를 타고 호숫가 주변을 맴돌았다.
이해할 수 없는 가사였지만, 래리티는 어쩐지 가슴이 아려왔다. 가슴 속에 먹먹히 가라앉는 우울의 앙금이 밤을 더 어둡게 만들었다. 외로움이 더 애달피 사무치도록 했고, 걱정이 더욱 깊어지게 했다.
노랫소리는 몇 분간 계속되며 천천히 래리티에게 가까워졌다.
노래는 여운을 남기며 끝이 났다. 이어서 팔라라우리아는 다른 언어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번 언어는 이전 것보다 억양이 억셌고, 음절 사이의 구분도 명확했다. 하지만 이전 노래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구슬프게 들렸다. 새로운 언어의 강한 발음이 이번 노래의 운율을 보다 극적으로 담아내고 있었고, 이는 래리티의 마음에 더 무겁게 다가왔다.
새하얀 유니콘은 저도 모르게 코를 훌쩍였다가, 제 풀에 놀라 초조한 숨을 들이켰다.
폐하께서 들으셨으면 어쩐담?
금빛 암사슴은 래리티가 걱정하는 조짐을 보이진 않았다. 그저 가까이 다가오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는 호수가 휘어지는 부분에서 호숫가가 아닌 빈 터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호수는 언제나처럼 평온했다.
팔라라우리아는 래리티에게 더 다가갔다. 억센 억양의 언어로 부르던 노래도 어느새 끝이 났다. 잠깐의 정적을 사이에 두고, 그녀는 또 다른 노래를 시작했다. 래리티는 초조함과 슬픔 사이에서 번쩍이는 놀라움을 느꼈다. 이번 노래의 언어는 래리티의 모국어 : 이퀘스트리아 어 였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이렇게 노래했다. :
Gil-Galad was an Elken King
길 갈라드는 엘크들의 왕이었노라고
Of him the harpers sadly sing.
하프를 타는 자들은 구슬피 노래했네.
The last whose realm was fair and free
산맥과 바다 사이를
Between the Mountains and the Sea.
공정하고 자유롭게 다스린 마지막 왕이었노라고
His hooves were sharp, his antlers keen,
그의 발굽들은 격렬했고, 뿔들은 예리했으며
His shining helm afar was seen.
번쩍이는 투구는 어디서나 보였네.
The countless stars of Heaven's field
천상의 수없이 많은 별들도
Were mirrored in his silver shield.
그의 은빛 방패에 안겨들었네
But long ago he rode awa-aay,
하지만 그는 오래 전에 사라졌고
And where he dwelleth none can sa-aay.
지금은 어디 있는지 아무도 알 길 없네.
Into darkness fell his star
그의 별이 떨어졌기에
In Annudûr where Shadows are.
그림자에 뒤덮인 아누두르의 어둠 속으로.
세 번째 노래가 끝나고, 금빛 사슴 군주의 발굽이 래리티의 바로 앞에 멈췄다. 별무리 같은 눈빛이 래리티에게, 모습을 감추고 덤불 뒤에 숨은 새하얀 관찰마에게 향했다.
“산책하기 좋은 밤이죠, 래리티?”
래리티는 몸을 거세게 한 번 움찔댔다. 그리곤 슬그머니 투명화 마법을 해제했다. 잠시 우물쭈물 대던 그녀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덤불 밖으로 발굽을 내딛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래리티는 고개를 숙였다.
“엿들으려는 건 아니었어요,”
“알고 있답니다.”
금빛 암사슴은 래리티의 얼굴을 마주보며 말했다.
“선객(先客)이 있다는 건 여기 왔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어요.”
“어머!”
새하얀 귀가 보라색 갈기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숨길 수는 없었다.
“의식을 훔쳐봐서 정말 죄송해요. 방해할 생각은 없었어요.”
“내 아이들은 그대가 있는지 모르더군요. 그거면 됐어요. 세례식이란 게 누가 본다고 해서 효능이 사라질 정도로 덧없는 의식인 것도 아니고요. 게다가, 이퀘스트리아에서 어린 포니들에게 거행하는 여명과 황혼 의식Dawn and Dusk ceremonies은 외부 포니들의 입회를 허가하지 않던가요?”
래리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스위티벨의 여명과 황혼 의식에 참여해본 적이 있었다.
저런 말씀을 하시는 걸 보니, 폐하께선 전혀 기분 상하지 않으신 것 같아.
래리티는 한결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화제를 돌렸다.
“폐하. 방금 부르셨던 노래.......아름다웠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무척 아름다운 노래죠.......그만큼 슬픈 노래기도 하지만.”
“맞아요.”
고개를 끄덕이던 래리티는 문득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왜 마지막 노래만 가사가 이퀘스트리아 어 였던 건가요?”
“루나가 작사했으니 그렇지요. 그것도 벌써 오래전 일이군요.”
금빛 암사슴은 놀라워하는 래리티를 바라보며 대답을 이어갔다.
“당시 아직 학생이던 루나가 곡을 들으며 가사를 붙였어요. 애도의 가사였죠. 장로들이 그 가사를 어찌나 마음에 들어 했던 지요. 놀라울 것도 없죠. 현대의 사슴들도 그 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사슴 군주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계속했다.
“‘애도하라. 우리가 잃은 것들을 기리며.’ 장로들이 이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 했는지 몰라요. 아직도 귓가에 생생해요. 장로들 밑에서 수학(受學)했던 건 수천 년도 더 전의 일인데 말이죠. 장로들은 늘 이렇게 말했어요. ‘애도하라. 언제나 애석해하라. 영원히 비통에 잠겨라. 한 때 온 지상의 정점에 군림했던 문명을, 욕심과 분노로 얼룩진 제 발굽으로 파멸시킨 사슴 종족을 위해. 그 대가는 영원토록 짊어질 슬픔이리니.’ 그리고 난, 장로들의 말에 따라 지금도 애도를 이어가고 있지요.”
별빛으로 아스라이 빛나는 밤하늘이 래리티를 주시했다.
“어떻게 생각하나요, 래리티?”
“.......저는.......”
래리티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제 입장에선 아무래도 감정이입을 할 수가 없을 것 같네요. 이퀘스트리아에선, 폐하의 종족들이 일으킨 내전에 대해선 아주 조금 밖에 가르치지 않아요. 대략적으론 알지만, 그 정도밖에 모르죠. 하지만 만약, 계속해서 애도하라는 말을 들으면 제가 어떻게 될 것 같은지 물으시는 거라면, 이건 확실히 대답해드릴 수 있어요 : 엄청 피곤에 찌들어보이게 될 거예요. 영원히 슬퍼할 수 있는 포니는 없을 테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장로들은 실제로 그렇게 하려는 것처럼.......애를 써댔죠.”
팔라라우리아는 몸을 돌려 호숫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래리티도 그 옆에서 발급을 나란히 했다.
“그 장로들 중 대부분은 이제 없죠. 기억을 되짚어보면, 그들은 늘 슬퍼하고 있었어요. 항상 그렇게 살아왔으니, 어떻게 안 그럴 수 있었겠어요?”
“폐하께선 전쟁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사슴 군주는 래리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금 밖에 몰라요. 나조차도 그 시대를 겪어보진 않았으니까요. 난 전쟁이 끝나고도 한참이나 후에 태어난걸요. 물론 장로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전해 듣긴 했죠.......그리고 과거를 들여다본 적도 있고요.”
그녀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본 바로는, 더없이 끔찍했어요. 천지가 개벽한 후로 그 정도 규모의 죽음과 파괴는 일찍이 일어난 적이 없었어요. 부디 포니들의 사회는 절대 그런 참상을 마주할 일이 없기를, 셀레스티아와 루나에게, 그리고 위대한 아버지들에게 바래요.”
“정말 무시무시했나 봐요.”
“그랬죠. 그리고 그게 내 애도의 이유에요,”
팔라라우리아는 고개를 다시 세우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다스리는 흰꼬리사슴들은 애도하지 않아요.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지 않았거든요.”
“어머, 왜 그러셨나요?” 래리티가 물었다.
“그대가 말한 대로, 평생 슬픔에 잠긴 채 살아갈 수 있는 생물체는 없으니까요. 전쟁을 겪었던 장로들은 슬퍼하며 살아갈 수 있었죠. 그들의 삶에도 한 때는 행복이 깃든 적이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런 영속적인 애도를 내 아이들에게도 짊어지게 하고 싶진 않았어요.”
사슴 군주는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로들은 우릴 죽어가는 종족으로 생각했어요. 불멸하는 시간의 흐름에 만물이 스러질 때까지 함께 시들어갈 거라고 여겼죠. 우리가 많은 것들을 잃은 건 분명해요. 애도해야할 것들도 차고 넘치죠. 하지만, 우린 현재의 삶을 살아가고 있어요. 래리티, 그대가 방금 봤던 아기는 올봄에 태어난 아이들 중 하나에요. 불행한 일을 겪지만 않는다면, 못해도 일백년은 살겠죠. 장로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사슴들은 ‘시들어가지’ 않아요. 이미 있었던 전쟁에 대한 절망도 이어가지 않을 거예요. 이게 내 아이들에게 애도를 가르치지 않은 이유에요. 대신 난 웃으라고 가르쳤죠.”
팔라라우리아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뭐, 이런 식으로 웃으라는 건 아니었어요. 품위 유지를 해야 하니까요. 그래도 미소 지으라고 가르치기는 했지요.”
래리티는 미소를 지었다.
“제 친구 핑키 파이가 할 것 같은 말이네요. 그 애였다면 이쯤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겠지만요.”
또 다른 의문점이 그녀의 뇌리에 떠올랐다.
“노래 하니 생각났는데요, 이퀘스트리아 어가 아닌 노래가 두 개 있었지 않았나요? 그 두 노래들도 서로 언어가 달랐던 것 같은데, 여기서 지내는 동안 두 언어 다 계속 들리더군요. 그 언어들은 뭔가요?”
“두 번째 노래는 흰꼬리사슴의 모국어로 불렀어요.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언어랍니다. 우린 그 언어를 기반으로 이름을 지어요. 내 이름도 거기서 따왔죠.”
팔라라우리아의 얼굴에 푸근한 온기가 어렸다.
“부친께서 말씀해주시기를, 어릴 적의 난 갓난쟁이처럼 시끄러웠다죠. 누군가 가까이만 오면 꽥꽥대며 횡설수설 악을 써댔다고도 하셨어요. 그래서 흰꼬리사슴 어, 즉, 세르볼라Cervóla 어로 ‘연설’ 을 뜻하는 단어가 내 이름의 첫 부분이 되었죠. 하지만 우린 대화할 땐 라우틸Laewtil 어를 사용해요. 이건 모든 사슴 종족 사이에 쓰이는 공용어로, 사슴 종족의 여섯 분파가 단일 왕국을 세우기로 결정했을 때 엘크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죠. 엘크 분파는 복잡한 것들을 노련하게 다룰 줄 아는 명민한 이들이었어요. 첫 번째 노래를 부른 언어가 바로 이 라우틸.......”
사슴 군주는 갑자기 말을 끊더니 목을 위쪽으로 뻗었다. 굳게 다물어진 입꼬리, 날렵한 콧잔등이 오른쪽 방향을 겨누었다.
“.......잠시만 실례하도록 할게요.”
그녀는 그 말만 남긴 채, 원래 없었던 것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덩그러니 남겨진 래리티는 호숫가에 멀거니 서 있었다.
“.......”
팔라라우리아가 텔레포트를 시전할 줄 안다는 건 이제 와서 놀랄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폐하계선 대단히 강력하신 분이니까. 이네스 양도 텔레포트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했었지. 말 그대로, 우리가 ‘깜짝 놀랄’ 정도로 말야!
래리티가 보기에 사슴들은 텔레포트라는 편리한 기술을 너무도 쉽게 해내고 있었다. 심지어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선보였던 ‘그’ 텔레포트와 같은 텔레포트가 맞는지 헷갈릴 정도로 쉬워보였다.
그래, 그 쉬운 텔레포트! 그걸 실패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안 되는 거였는데.
그렇게 후회하는 와중에도, 래리티는 어쩐지 텔레포트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는 번개를 배워야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있던 레인보우 대시의 심리와 비슷한 데가 있었다.
대시 정도로 트라우마틱한 뉘앙스가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지. 하지만 트와일라잇이 나 때문에 크게 다친 건 분명한 사실이야. 날 가르쳐주려다, 내가 실패해서, 날 도우려다가. 모든 일들이 나한테서 시작됐어. 그러니 그걸 끝낼 의무도 나한테 있는 거야.......
“미안하게 됐어요.”
그 순간 팔라라우리아가 돌아왔다.
“탑에서 확인해볼 게 있었거든요. 아치백 산악지대 쪽의 방어막은 자가 수복이 안 돼서 주기적으로 살펴봐줘야 하지요.”
그녀는 새하얀 유니콘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진 것을 보았다.
“무슨 일 있나요?”
“그게, 저.......”
래리티는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 시전하시는 텔레포트는 너무 우아해요. 그리고 심플해 보이구요. 혹시 유니콘이 시전하는 텔레포트 보신 적 있으세요? 타는 건초에서 나오는 연기 같은 마력 구름에, 파티할 때나 뿌릴 것 같은 반짝이가 범벅으로 터져 나온다구요. 굉장히, 음, 화려하달까요. 사실 제가 화려한 걸 싫어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뻐기는 것처럼 보여요. 겉모습만 보면, 전 폐하께서 쓰시는 방식이 훨씬 좋아요.”
“호오, 그런가요?” 팔라라우리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네네, 정말로요!”
금빛 암사슴의 입꼬리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
“그럼 한 번 배워보는 게 어때요?”
래리티는 헛숨을 들이켰다.
“배워요? 제가요? 세상에, 물론이죠! 꼭 배우고 싶어요! 하지만.......전 포니인걸요. 사슴 마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
“마법은 마법일 뿐이랍니다.”
팔라라우리아가 말했다.
“어떤 생물체든 주문을 배울 정도의 지능만 갖췄다면, 어떤 종족의 어떤 주문이든 상관없이 배울 수 있어요. 중요한 건 충분한 마력과 기량을 갖추었는지 여부지요. 사슴 마법 중에는 평균적인 유니콘들의 마력보다 많은 양의 마력이 요구되는 것도 있지만, 텔레포트는 그렇지 않아요. 그건 마력이 적게 드는 축에 속하는 마법이죠. 기량 측면에서 보자면, 높은 집중력과 세심함, 그리고 강한 상상력이 필요해요. 래리티, 그대는 어떻죠? 이것들을 갖추고 있나요?”
“네!” 래리티는 열정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좋아요. 지금 여기서 가르쳐주도록 하지요. 느낌만 잡으면 어렵지 않아요. 우선 이것부터 알려줄래요? 유니콘들은 어떤 식으로 텔레포트를 하죠? 주문의 작동원리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나요?”
“음.......”
새하얀 유니콘은 트와일라잇의 가르침을 기억 속에서 되살렸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제 친구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이렇게 말했어요. ‘유니콘은 가고 싶은 장소에 도달해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텔레포트를 한다’라고요. 그 장소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린 다음, 거기에 있는 자신의 모습도 상상하는 식이죠. 그리고 마력을 순환시키는 거예요.”
“시각적 형상화에 집중하는 방식이군요. 우리 사슴들의 텔레포트는 촉각적 형상화에 기반을 두고 있어요.”
팔라라우리아는 래리티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이제 그녀는 래리티를 코앞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슴들은 텔레포트를 통해 가게 될 장소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생각하지 않아요. 어떤 느낌일지부터 상상하죠. 그 새로운 장소가 우리의 피부에, 털에, 발굽에 어떻게 느껴질 지 말이에요.”
“알 것 같아요!”
“아는 것보다 느끼는 게 중요해요.”
팔라라우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타일렀다. 별빛 눈동자가 천천히 깜박였다.
“난 그대가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대가 살아온 삶은 이런 방식의 텔레포트에 적합할 거예요. 드레스를 만들잖아요, 그렇죠?”
“맞아요.”
래리티는 순간적으로 평소의 텐션대로 대답했다.
“전 이퀘스트리아에서 가장 파-뷸러스하고 패셔너블한 드레스를 만든답니다!”
“후훗. 엘크들 같은 화법이군요. 어쨌든, 그대는 다양한 옷감의 색 뿐만 아니라 그 질감, 느낌과 무게에도 익숙하겠죠?”
“아, 물론이에요. 물론 그래야지요.”
패션과 드레스 작업은 래리티의 열정의 본질이나 다름없었다. 이 불타는 열정에 대한 대화를 마지막으로 나눠본 게 언제였던가? 오랜만에 느껴보는 익숙한 행복감이 래리티의 온몸에 번져갔다.
“프로페셔널한 디자이너라면 언제나 질감만 가지고도 무슨 옷감인지 알 수 있어야 해요. 눈을 감은 채로도 트위드tweed인지, 모헤어mohair인지, 호스팩hospack인지, 리넨linen인지, 캐시미어Cashmere인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하고요! 네이폴리Neighples엔 이런 격언도 있다고 해요. ‘설령 눈이 보이지 않는 포니라도 옷을 잘 입을 수 있다.’ 저도 이 격언에 마음 깊이 동의해요.”
“그럼 그대는 무언가를 만지고 그 촉감에서 정보를 얻어낼 줄 안다는 거군요.”
팔라라우리아가 조언했다.
“물체들의 촉감에 대해 머릿속에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예요. 그게 사슴들 방식의 텔레포트에서 제일 중요한 점이거든요.”
팔라라우리아는 래리티의 주변을 원 모양으로 맴돌며 조곤조곤하게 속삭였다.
“텔레포트로 가게 될 장소의 겉모습을 상상하는 게 아니에요. 그 느낌을 상상하세요. 그 장소에 간 그대가 어떤 걸 느끼게 될 것인지-그대의 발굽이 딛고 선 지면의 촉감, 그대가 주변 공간에서 받게 될 인상, 그대의 피부를 타고 지나가는 공기의 흐름까지. 어떤 소리가 들릴 지까지도 상상할 수 있어요. 그 장소에 나타나는 당신의 모습 대신, 그 장소에 이미 있는 당신이 느끼게 될 것들을 상상하세요.”
래리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사슴 군주의 설명은 충분히 직설적이었다.
만약 폐하의 말씀대로, 촉감으로 옷감을 알아맞히는 능력이 사슴 방식의 텔레포트의 요령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면.......난 분명히 할 수 있어.
“그렇게 상상하고 난 다음에는, 어쩌죠? 뿔에 마력을 순환시키면 되나요?”
“그대의 뿔을 통해서, 그리고 생각을 통해서 지요.”
팔라라우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해보도록 해요.”
래리티는 마른 침을 삼켰다.
“제가 준비가 됐을까요?”
“아주 복잡한 주문인 것도 아니니까요. 게다가, 중요한 건 연습이랍니다. 쉬운 것부터 해보죠. 여기서 호수의 반대편 기슭까지 텔레포트 해보는 거예요.”
팔라라우리아는 은빛 수면의 호수 건너편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내가 저 쪽으로 가서 표식이 되도록 하지요.”
그녀는 호수 건너편으로 텔레포트했다. 이제 새하얀 유니콘과 금빛 암사슴은 거의 일직선상에 위치해 있었다.
“내 옆으로 텔레포트 해 보세요.”
팔라라우리아가 말했다.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래리티는 그녀가 여전히 자신의 귓가에 대고 말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보려고 하지 마세요. 느껴야 해요. 상상하세요. 그대의 발굽 아래에 있게 될 잔디를, 그대의 피부에 닿게 될 밤공기를. 그대의 귀에 속삭일 부드러운 침묵을.”
래리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곤 호수의 건너편을 상상했다. 집중했지만, 집중하려고 애를 쓰진 않았다. 그저 부드럽게, 그 느낌을 내면에 받아들였다.
건너편은 풀로 덮여 있을 거야. 하지만 짧게 자란 풀들이겠지. 흙은 조금 축축하지 않을까? 폐하께서 세례식을 하실 때 호수 물이 많이 흘러내렸으니까. 그럼 조금 질어 있을 수도 있겠다.
밤공기가 래리티의 피부에 부딪혀 부드럽게 흩어졌다. 드높이 떠있는 광점(光點)의 안락한 금색 빛이 새하얀 털을 물들이며 소곤거렸다. 근처의 숲에서는 자연과 흙의 냄새가 났다.
“이제, 마법을 그대의 감각에 흘려보내세요.”
래리티는 닫혀있던 마력 회로를 해방했다. 대기를 흐르던 마력이 유니콘의 마력 회로를 거쳐 다시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녀는 순환하는 마력이 자신의 몸을 가득 채우도록 했다. 마력은 모래사장의 낙서를 지우는 파도처럼 그녀의 시각적인 상상들을 지워나갔다. 순환하는 마력이 많아질수록 그녀의 뿔엔 마력이 모여들었고, 주변 공간을 밝게 비추었다.
“지금이에요.”
래리티는 모여든 마력을 아주 살짝 ‘밀어냈다.’
“.......”
세상은 고요하기만 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만 같았다. 그녀는 또 한 번 절망을 맛보며 자조했다.
그래도 최소한, 저번처럼 요란한 폭발이 일어나진 않았네.......
“해냈군요, 래리티.”
팔라라우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옆에서.
그제야 래리티는 발굽 주변의 잔디의 촉감이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새하얀 눈꺼풀이 조심스레 들어 올려졌다. 옆에 서 있는 금빛 암사슴이 보였다.
푸른 눈동자가 호수 건너편-조금 전까지 그녀 자신이 서있던 곳을 향했다. 그리곤 다시 발굽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분명히 건너편에 도달해 있었다.
래리티의 얼굴에 웃음기가 서서히 번져나갔다. 입꼬리가 움찔대며 벌어지더니, 이내 귓가에 닿을 듯 헤벌쭉해졌다. 발굽이 탭댄스를 추듯 신나게 지면을 굴러댔다.
“와하하하하!”
래리티는 행복에 겨워 폴짝폴짝 뛰었다.
“내가 해냈어!! 내가 해냈다구!!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었잖아!”
그녀는 자신의 왼편의 빈 공간에 정신을 집중했다. 이번엔 눈을 뜬 채로, 그녀는 그 공간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가져다 줄 ‘느낌’을 상상했다.
주변의 잔디, 흙, 빛, 공기, 소리.......
.......가 갑자기 바뀌었다. 시야가 무언가에 홱 잡아당겨진 듯 했다. 세상을 뛰어넘은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이제 래리티는 다른 장소에서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팔라라우리아가 서 있는 위치를 확인했다. 조금 전 왼편에 있던 빈 공간은 이제 그녀의 오른편에 위치해 있었고, 그 너머에 팔라라우리아가 있었다.
“또 해냈어!”
래리티는 호수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그 쪽은 다른 제방들이 있는 방향들보다 더 먼 방면이었다. 그녀는 집중했다. 그 머나먼 제방에 닿았을 때 그녀에게 밀려들 온갖 감각들을 상상했다. 새하얀 뿔이 다시 한 번 반짝였고-
폐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야! 별로 힘들지도 않아!
주변의 세상이 또 한 번 그녀를 끌어당겨졌다. 새하얀 발굽이 반대쪽 제방을 디뎠다.
조금 더 기쁨에 몸서리 친 후, 래리티는 팔라라우리아의 곁으로 돌아왔다.
“아아, 트와일라잇! 그 애가 이걸 보면 얼마나 좋아할 지!”
팔라라우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 스스로 자랑스러워해도 좋아요, 래리티. 난 그대를 지켜봐왔어요. 그대는 많은 것들을 성취해왔죠.”
래리티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금빛 암사슴을 올려다보았다.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대는 자기 자신조차도 확신하지 못했어요. 무척 망설임 많은 존재였죠. 나조차도 그대의 마음과 생각을 읽어낼 수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위험한 여행을 시작할 결심을 한 생물체라면, 설령 겉으론 혼란스러워 보일지라도 그 토대엔 굳건한 용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오늘 밤, 그대는 그게 옳았음을 증명해 보이는군요.”
팔라라우리아는 움직임을 멈추고 래리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밤하늘 같은 눈동자에 새하얀 유니콘이 잠겨들었다.
래리티는 어쩐지 편치 않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마치 해머 후프 앞에 서있을 때 느꼈던 것 같은, 내면을 낱낱이 파헤침 당하는 감각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이번 것이 그 때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녀가 유니콘인 탓이었다.
마력이 느껴져. 이건 마법이구나. 폐하께서 강력한 마법을 써서 날 보고 계시는 거야.
“래리티. 이퀘스트리아의 유니콘 포니여.”
팔라라우리아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 말투엔 이전과 같은 나긋나긋함은 없었다.
“그대는 이 밤에, 적절한 때에 본 녹(鹿)을 찾아왔노라. 앎의 권능이 이미 그려주었으매, 녹은 그대가 오리란 걸 알고 있었노라. 녹이 그대를 알기조차 전에, 그대와 그대의 친구들이 길드데일을 건너고 있음을 녹이 인지하기조차 전에, 녹은 그대가 오리란 걸 보았느니라. 우리가 걸어온 길은, 녹이 보건대, 결국 겹쳐질 운명이었음이라. 다만.......녹은 망설이노라. 녹이 해야 할 일을, 녹이 해야 할 말을.......그대는 이미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있노라. 오늘밤 본 녹이 하는 말을 듣고 나면, 그대의 짐은 더 무거워지리라. 그대의 작은 등엔 너무도 과혹한 일이니, 녹은 지금도 그 짐을 그대에게 지우기를 망설이노라.”
<"녹은 지금도 그 짐을 그대에게 지우기를 망설이노라.”>
래리티의 몸이 전율을 일으켰다.
폐하께서 나한테 말해줄 게 있으시다고? 근데 그게 나한테 짐이 된다고?
그러나 어느 순간, 그녀의 마음은 친구들에게 향했다.
내 친구들에 대한 걸까? 아니면 트와일라잇에 대해? 어쩌면 그 아이를 도울 수 있는 걸지도 몰라. 아니면 다른 친구들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고.
‘트와일라잇과 친구들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가정은 마치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래리티의 마음 깊숙이에 자리 잡았다.
“그 짐을 지면, 제 친구들을 도울 수 있을 까요?”
금빛 암사슴은 즉답을 내놓지는 않았다.
“.......그러하다.”
마침내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그대의 친구들 뿐 아니라, 다른 생물체들 역시 도움을 받게 될 터이니.”
“그렇다면 말씀해주세요.”
래리티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다른 이들이 짊어질 필요가 없는 짐이라면, 제게 맡겨주세요. 제가 할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정말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지만.......노력은 해봐야 하잖아요.”
“그대는 녹이 무슨 말을 꺼낼 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호언장담하는군.”
팔라라우리아는 짐짓 냉소적으로 굴었다.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 지는 상관없어요.”
새하얀 유니콘은 꿋꿋하게 받아쳤다. 사슴 군주의 밤하늘에 깊은 푸른빛을 띠는 별이 반짝였다.
“어.......음, 상관있을 수도 있지만요.”
잠시 머쓱해하던 래리티는, 그러나 이내 고개를 당당히 세워들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되지 않도록 발버둥은 쳐봐야겠죠. 자, 말씀해주세요.”
“래리티, 그대는.......”
굳게 앙다물어져 있던 입꼬리가 느슨해지더니, 다시 평소와 같은 곡선을 그렸다.
“.......아주 강하고 용감하군요.”
팔라라우리아가 말했다.
“그대를 의심해선 안 되는 거였네요. 좋아요. 알려주도록 하지요. 먼저 한 가지 밝히자면, 그대와 친구들이 함께 있던 자리에서 난 그대에게 거짓말을 하나 했어요.”
“뭐에.......대해서요?”
“사실, 난 관용의 원소가 부여하는 재능이 뭔지 알고 있어요.”
팔라라우리아는 덧붙여 설명했다.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 알고 있지요.”
“그게 뭔가요?”
“위대하면서도, 끔찍한 재능이에요.”
팔라라우리아는 조심스레 말했다.
“아주 가까운 시일 내에 겪었던 경험을 토대로 하는 말이에요.”
“그 재능에 얽혔던 경험이 있으신 건가요?” 래리티가 재차 물었다.
팔라라우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많답니다. 아주, 많아요.”
금빛 암사슴은 자신을 응시하는 새하얀 유니콘을 잠시 지켜보았다.
이걸로 충분해. 이 유니콘도 곧 알게 되겠지. 영특한 아이니까.
그리고 정말 그랬다.
깊고 푸른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팔라라우리아는 복잡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관용의 원소의 재능은 천리안이에요. 붉은사슴들의 재능과 같죠. 내가 가진 것처럼 말이에요.”
금빛 암사슴은 눈을 감았다.
“축하해요, 래리티. 부디 그 재능을 싫어하지 않길 바라요.”
“하, 하지만.......”
래리티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아니, 세상에, 이건, 폐하, 폐하의 그 멀고 먼 데를 보는 시야가 관용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죠? 그것보단 차라리.......잘은 모르겠지만.......뭐든 상관없이 뭔가를 계속 줄 수 있는, 그런 게 더 말이 되지 않나요?”
“진정한 관대함이란, 언제나 줄 수 있는 것을 의미해요. 가진 물품이나 부가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에요.”
팔라라우리아가 말했다.
“시간을 주기도 하고, 재능을 주기도 해요. 위대한 사랑을 느낀다거나,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목숨까지도 주지요. 그대도 알지 않나요, 래리티? 그대는 지금보다도 훨씬 가진 게 없던 시절에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포니들이나 생물체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어요. 그대는 베푸는 걸 망설이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테죠. 진정 관용에 필요한 능력이란, 다른 이들이 어떤 곤경에 처해있는지 그리고 무엇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을 지 파악하는 거예요. 이게 관용의 원소가 부여하는 재능이 천리안인 이유에요. 이 재능을 가진 이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생물체를 찾아낼 수 있어요. 숨겨진 장소에 있든,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상관없이 말이에요. 과거도 볼 수 있죠. 그 생물체가 겪은 경험을 기반으로, 그 생물체가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예요. 미래도 볼 수 있어요. 언젠가 곤경에 처한 생물체를 만났을 때, 그를 돕기에 적절한 것을 미리 준비해두기 위해서지요.”
“전.......”
래리티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황망히 주워섬겼다.
“아냐, 전 그런 점쟁이 같은 게 아녜요! 트, 트와일라잇은-”
“트와일라잇 스파클이라도 전 세계에 있는 모든 마법을 다 아는 건 아니지요.”
팔라라우리아는 딱 잘라 말했다.
“내가 보는 시야가 어떤지 그대에게 묘사해준 적이 있죠, 래리티. 생물체들의 앞에 놓일 선택지들과 무생물이 맞닥뜨리게 될 상황들이 내게 어떻게 보이는 지 말이에요. 그대의 시야도 내 것과 비슷할 거예요. 그대는 그 재능을 갖고 있어요. 난 그대의 삶을 굽어보면서 확신했어요. 생각해보세요, 래리티. 다른 이들이 잃고 그리워하는 무언가가 있음을 미리 인지한 순간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에 대해, 타고난 눈치나 단순한 뒷조사 수준으론 캐내기 힘들 정도로 세세히 읽어낼 수 있었던 순간은 얼마나 많았는지.”
팔라라우리아는 고개를 위로 들어올렸다. 마력이 맺힌 위풍당당한 뿔들에서 빛이 일렁였다.
“포니빌의 친구들이 후일에 어떤 걸 필요로 하게 될 지 미리 인지할 수 있었던 순간은 얼마나 많았던가요?”
“.......”
래리티는 기억을 되짚었다. 생각해 보면,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천성은 그녀가 망아지였던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 시절 래리티의 선물이 상대에게 늘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었다. 어린 그녀의 선물들은 잠재적으론 유용할 수 있어도 당장은 쓸모가 없는 것들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선물을 받게 된 이들은, 그녀의 친구들이든 누구든 대체로 이런 식의 대답을 내놓았다 : ‘오, 래리티. 이게 웬 선물이야? 고마워. 근데 다 좋은데 말야, 이걸 어디다 써야 할지 모르겠는 걸?’
선물을 받은 상대가 래리티에게 ‘진정한’ 대답을 하기까진 짧으면 며칠, 길면 수개월에서 몇 년까지도 걸렸다. 하지만 얼마나 걸리든 답례는 꼭 돌아왔다. 길거리에서 마주치거나, 혹은 래리티의 집 문을 두드리거나 하는 식으로. 방식은 제각각 달랐지만, 그들 모두 새하얀 유니콘에게 마음 깊이 감사를 표했다.
상념을 이어가던 래리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쩌면, 내 패션 감각도 이거랑 관련이 있을 지도 몰라!
래리티의 패션 트렌드 예측은 단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다. 돌아오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넘어 한 해 뒤에 돌아올 트렌드까지도 정확히 알아맞혔다. 그녀의 예측은 백발백중이었다.
카루셀 부티크의 충성스런 고객들은 이미 자신들의 메인 디자이너에게 깊은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패션 트렌드에 대한 래리티의 일 년치 예측이 하나하나 실현되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목도한 이들이었다. 아무도 그녀가 일 년치 트렌드를 어떻게 알아맞힐 수 있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도 자신이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었는지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난, 그냥 알았는걸. 그냥 알 수 있었어.
게다가 다른 포니들을 볼 때면, 래리티는 그들이 어디를 갔었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다고 느낀 적이 많았다. 그녀는 이 현상을 자신의 강박적인 디테일 집착증 탓으로 치부했었다.
이것도 이유긴 이유였을 거야, 다만 더 큰 이유의 일부일 뿐이었던 거겠지.......
“이제 이해가 되죠?”
팔라라우리아가 침묵을 깨트렸다.
“방금 말했듯이, 그대의 시야와 내 시야는 비슷해요. 하지만 차이점도 있지요. 그대의 시야엔 통찰안이 없기 때문에 진실을 가려낼 순 없어요. 그대는 미래를 볼 순 있어도, 그 중에 진짜 일어날 미래를 가려내는 건 쉽지 않을 거란 의미지요. 사실,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강력한 재능이지만요.......강력하고.......그만큼 끔찍하죠. 방금 말했듯이.”
금빛 암사슴의 목소리가 드물게도 침통해졌다. 그러나 래리티는 힘차게 대답했다.
“하지만 다른 포니들을 도울 수 있잖아요! 폐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요! 폐하께서도 아시죠? 저는 여행하는 내내 밤마다 꿈을 꿨답니다. 꿈이란 게 대개 그렇듯이 얼토당토않은 것들이 많긴 했지만, 뭔가 의미가 있어 보이는 부분도 하나쯤은 있었어요. 그런 것들은 며칠 내에 실제로 일어났고요!”
“여행길에서 느낀 스트레스가 그대의 재능을 자극한 거예요. 쉬머우드 숲을 감싸는 마력 때문이기도 하고요. 애플잭과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럼 제 재능도 애플잭 것처럼 더 연습해서 강하게 만들 수 있는 거겠죠?”
“원한다면 가능하지요.”
팔라라우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 지는.......글쎄요. 누가 대답해줄 수 있을까요? 이건 단순히 안다 모른다가 아닌, 그 이상의 문제랍니다. 래리티. 과거에는 조화의 원소 수호‘자’라는 건 없었어요. 대신 수호자‘들’이 있었죠. 그대와 그대의 친구들은 특별한 경우에요. 조화의 원소들이 각각 하나씩 단일 개체에게 전담되고, 그 재능이 단 하나의 수호자에게만 부여되는 일은 지금껏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어요. 그대와 그대의 친구들이 원소에게서 받은 재능이 얼마나 강력하게 발휘될 지는 나조차도 감히 짐작할 수 없어요. 내 권능으로 봐도 모든 상황이 불확실해요. 다만, 그대의 재능이 내 권능만큼, 아니면 그 이상으로 정확해질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하죠.”
팔라라우리아의 눈꺼풀이 완전히 열렸다. 우거진 나뭇가지들로 가려진 밤하늘의 일부가 그녀의 눈을 통해 보이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대는 만물의 위에서 절대적으로 실현되는 확실한 미래를 엿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르지요. 그런 게 가능하다면 말이지만.”
래리티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내가 폐하보다도 강력한 점쟁이, 아니, 이제 이렇게 표현하면 안 되겠지. ‘관찰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게대가 내 친구들 모두 조화의 원소가 주는 재능을 하나씩 갖고 있었다는 거야?
“폐하께선 관용의 원소의 재능이 끔찍하다고 계속 말씀하셨죠.”
래리티는 애써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그건, 무슨 의미죠?”
“뻔하지 않은가요?”
이 말을 하고 팔라라우리아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대는 앞으로 만나게 될 모든 생물체들의 미래를 볼 수 있게 된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퍽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들 자신조차도 아직 살아보지 않은 삶을 보게 된다는 뜻이지요. 그들이 겪게 될 고통과,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까지 보게 될 거예요. 그대가 본 미래들 중 적어도 하나는 정확하리라는 걸 알고 있는 채로요. 또한 그대는 도시의 성장과 쇠퇴, 몰락도 볼 수 있을 거예요. 한 가정의 자식들이 자라고, 출가하여 부부가 되어 또 다른 가정을 꾸리고, 그렇게 시들어가다가 무(無)로 돌아가는 것도요. 숲과 농지, 산맥들이 늙어가는 모습도 볼 수 있겠죠. 그리고........래리티. 그대 자신의 미래도.”
“그, 그러면.......”
입 밖에 낼 문장과 함께 커져가는 두려움을 곱씹으며, 새하얀 유니콘은 물었다.
“.......혹시 폐하께선 스스로의 미래를 본 적이 있으신지요?”
“있지요.”
팔라라우리아는 선뜻 긍정했다.
“난 내가 어떻게 죽을지, 언제 죽게 될 지 거의 정확하게 알고 있어요. 내 최후를 내가 알게 된 그 순간은, 정말 끔찍한 기분이었지요. 그대라면 충분히 상상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오른편으로 몸을 돌린 뒤 래리티의 주변을 원을 그리며 걷기 시작했다. 사슴 군주의 눈동자는 초점 없는 별밤하늘로 가득 차 있었음에도, 래리티는 어쩐지 그녀가 자신을 째려보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미래를 안다는 사실은 그대에게 무시무시한 선택들을 끊임없이 강요하죠. 그대는 매순간 선택지들 앞에 내몰려야 하고, 각 선택에 따라 만들어질 미래들 사이의 무게를 저울질해야 해요.”
사슴 군주는 걸음을 멈췄다. 별밤하늘이 다시 한 번 새하얀 유니콘을, 마치 추모의 별자리처럼 제 안에 띄웠다.
“예를 들자면. 지금 난 그대와 그대의 친구들을 죽일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어요.”
래리티의 머릿속에서 혼란마저 사라졌다. 떡 벌어진 입술 사이로, 평상시의 그녀라면 절대로 내지 않았을 법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에엥?”
은은하게 떠있던 별들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밤하늘을 가득 채웠다. 영롱하던 사슴 군주의 눈은 이제 흉흉히 타오르는 하얀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새하얀 공허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치백 산악지대로 가는 그대들의 여행이 어떤 결말로 치달을지, 본 녹은 이미 보았느니라! 그대들이 해방시킬 암흑의 존재가 거기에 있노라! 그대들의 경솔한 발굽이 일으킨 바람이 태풍이 되어 쉬머우드 숲을 파괴할지니!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수백만의 생명들이 그 존립을 위협받게 되리라!”
새하얀 마력이 군주의 뿔을 휘감으며 폭발적으로 소용돌이쳤다. 머리 위에 떠있던 금빛 광점들이 하얗게 변하더니 섬광처럼 번쩍이기 시작했다. 우거진 나뭇가지들이 무시무시하고 울퉁불퉁한 팔들로 변해-나한테 오잖아!
래리티는 형언할 수 없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새하얀 뒷다리가 필사적으로 지면을 차대며 엉덩이를 밀어냈다.
팔라라우리아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압감이 넘쳤다. 대기 중에 넘실대는 마력이 사슴 군주를 중심으로 웅대한 파문을 일으켰다. 쉬머우드 숲의 만물이 그 권위 앞에 숨을 죽이고 반짝임을 지웠다.
“앎의 권능자로서, 녹은 그대들 전원을 말살할 것이니 이는 수백만 생명의 안위와 온 세상의 안녕을 위함이라! 본 녹에겐 그만한 힘이 있으매, 그대들을 멸살하는 건 어린 사슴의 발목을 꺾는 것보다도 쉬울진저! 설령 깨우친 페가수스의 번개 구름이라 할지라도 감히 녹의 뿔보다 높이 뜨진 못하리니! 녹의 마력은 그 이름 높은 태양의 여신과 비견될 만하며, 사특한 것들은 녹의 발굽소리만 듣고도 섬광의 악몽에 갇혀 절규했노라!”
군주의 호령에 풀잎들마저 래리티를 할퀴려는 듯 날카롭게 일어섰다. 새하얀 유니콘은 비명과 함께 애원했다.
“제발! 아니에요!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저흰 그럴 생각 없어요! 그냥 저희 친구 트와일라잇을 구하고 싶을 뿐이라구요!”
“하지만.......”
질끈 감겨있던 새하얀 눈꺼풀이 살짝 떠졌다. 팔라라우리아의 흉악하던 표정과 타오르던 마력이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었다. 섬광처럼 번쩍이던 빛은 어느 샌가 희미해져있었고, 곧 평상시의 밝기로 돌아갔다. 래리티를 향해 뻗쳐오던 나뭇가지들도 움직임을 멈추더니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슴 군주의 뿔에서 몰아치던 백색 마력이 모두 사라졌다. 그녀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던 눈부신 광채도 희미해져갔다. 그것들은 다시 점점이 떠오른 별로 화(化)하여 평온한 밤하늘 같은 눈동자의 일부로 돌아갔다. 광점의 섬광들이 서서히 희미해지며 본래의 은은한 금빛을 되찾았다.
“하지만.......내가 만약 여기서 그대를 막는다면.......그대들의 여정을 지금 끝내버린다면.......트와일라잇 스파클은 분명히 죽게 돼요. 그리고 목숨을 위협 받던 수백만의 삶들은, 자신들이 죽을 뻔했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살아가게 되겠죠. 사실, 아직까진 그대들의 행동의 결과로 목숨을 잃은 생물체는 없어요. 그런데도 오늘밤 내가 그대들의 여행을 결딴낸다면.......적어도 하나는 확실히 죽게 되겠지요.”
팔라라우리아는 처연히 고개를 숙였다. 운명의 갈림길 앞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엔 기나긴 삶도, 위풍당당한 뿔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제 그녀는 덧없고 미숙한 암사슴처럼 보일 뿐이었다.
“보세요, 래리티. 난 지금 수백만의 죽음의 가능성과 하나의 확실한 죽음 사이에서 저울질을 해대고 있어요. 다수의 필요와 소수의 필요의 충돌, 잠재성과 실재성의 충돌. 모두 관찰자가 감내해야할 것들이지요.”
“폐.......폐하.”
래리티는 떨리는 다리로 몸을 일으켰다.
“전.......”
말문이 막혔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래리티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앎의 권능을 지니신 폐하께, 어떻게 해야 운명 같은 건 없다고 전할 수 있을까? 게다가 난 포니인 걸. 큐티마크에 따라 살아가는-아, 그래. 그거야.
“위대하신 사슴 군주, 레이디 팔라라우리아시여.”
래리티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이전보다 퍽 안정적이었다.
“저, 저는 폐하께서 보신 것들이 실현되지 않으리라고 말씀드리지는 않을 거예요.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들도 있다고, 저는 믿거든요. 포니들의 경우엔, 자라면서 재능을 찾게 되면, 그 재능에 걸맞는 큐티마크를 갖게 되어요.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운명이란 것도 분명 있어요.”
팔라라우리아는 골똘히 래리티를 지켜보았다. 래리티의 입가에 새싹 같은 미소가 지어졌다.
“전 그걸 인정했고,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만약 제가 관용의 원소의 재능을 사용하기로 결심한다면, 전 이것부터 생각해볼 거예요. ‘내가 앞으로 하게 될 행동들이 사실은 이미 결정지어져 있었던 걸지도 몰라. 그럼 난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새하얀 유니콘는 입가를 올리며 해맑은 웃음꽃을 피워냈다.
“제겐 믿음이 있답니다, 폐하. 저는 만물에 깃든 선함을 믿어요. 저는 이 세상엔 사악함과 어둠 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들이 있다고 믿어요. 저는 셀레스티아 공주님과 루나 공주님, 그리고 다른 신들, 물론, ‘태양의 여신만큼 강력하신’ 폐하도 포함해서, 모두들 선한 결과로 이어지는 길을 걷고 계신다고 믿어요. 자, 이제 폐하께서 하셨던 말씀들을 되짚어보자면, 아무래도 신, 혹은 신적인 존재들에게도 믿음이 필요한 것 같지 않나요? 그러니, 한 번 믿어보세요, 폐하. 폐하께선 미래를 보실 수 있잖아요. 믿음을 갖고 보시는 미래엔 분명 아무런 장해도 없을 거예요. 저는 알 수 있어요. 선에 대한 믿음을 갖고 보는 미래야말로 우리가 쟁취하게 될 미래예요. 그 믿음을 갖기 위해 필요하신 게 있다면.......”
래리티는 자신을 향해 보란 듯 턱짓을 해보였다.
“저를, 이 유니콘 래리티를 한 번 믿어보세요! 제 친구들도요! 레인보우 대시, 애플잭, 트와일라잇 스파클, 핑키 파이, 플러터 샤이를요! 조화의 원소가 저희들에게 왔다는 건, 저희가 세상을 위해 선한 일을 할 것이기 때문일 거예요. 그러니 저희가 해낼 거라고 믿어주세요! 그 어떤 불행이 덮쳐오더라도, 그 어떤 해악한 것이 앞길을 막아서더라도, 저흰 굳건히 맞설 거예요. 미약한 힘이지만, 저흰 우정과 세상의 선을 위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거랍니다. 그리고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예요. 제겐, 이런 믿음이 있답니다. 만약 폐하께서도 이러한 믿음을 가지실 수 있다면.......저흴 보내주실 수 있을 거예요.”
그녀의 큐티마크-마름모꼴의 푸른 보석 세 개가 반짝였다.
“폐하께선 저흴 보내주실 거예요. 전.......‘보여요.’”
암사슴은 래리티에게 몇 걸음 다가섰다. 그녀의 속내엔 떠돌아다니는 야만 사슴과 같은 불신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래리티의 얼굴 바로 앞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새하얀 유니콘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암사슴을 마주했다.
팔라라우리아는 래리티의 오른 뺨을 핥았다. 그리곤 왼쪽 뺨도 핥은 뒤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내 믿음을 그대에게 주겠어요, 래리티.”
사슴 군주가 말했다.
“오늘밤, 그대는 내 권능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까지 내게 증명해 보이는군요. 놀랄 것도 없죠. 사실 나조차도 내가 뭘 보고 있는 건지 모를 때가 많으니까요.”
그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그대들을 보내줘야겠어요.”
“혜안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래리티는 몸을 낮추며 답했다.
“아뇨, 래리티.”
팔라라우리아는 단호히 말했다.
“오히려 내가 고맙지요. 그대는 장래 위대하고 현명한 관찰자가-, 아니, 분명, 그대는 이미 그러한 관찰자에요.”
사슴 군주의 뿔에서 빛이 일렁이더니, 표지가 보랏빛 가죽으로 제본된 두꺼운 책이 공중에 나타났다.
“백여 년 전에 내가 쓴 책이에요. 천리안에 대한 내 생각과 경험들이 담겨 있죠. 난 내가 이 책을 쓰게 될 거란 걸 알았기에 썼어요. 내가 봤던 미래대로 행동했던 거죠. 사실 붉은사슴 분파는 이미 대가 끊긴 터라, 누가 이 책을 읽고 사용하게 될지는 알 수 없었어요. 하지만 이제 알겠네요. 그대를 위해 썼던 거예요. 자, 봐요. 여기 그대의 큐티마크도 있잖아요.”
책의 앞표지엔 팔라라우리아의 말대로 마름모꼴의 크리스탈 세 개가 그려져 있었다.
“이 책을 가져가세요. 그리고 읽으세요. 그대가 취할 수 있는 모든 현명함을 여기서 그러모으도록 해요. 하지만 그대가 본래 마음속에 품고 있던 소중한 것들은 꼭 지켜내야 해요.”
래리티는 마법을 이용해 책을 받아들었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그녀는 고개를 숙인 뒤 말을 이었다.
“저기,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만 자러 돌아가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러도록 하세요.”
팔라라우리아가 말했다.
“좋은 꿈 꿔요, 래리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정말 고마워요. 그대는 내게 많은 영감을 주었어요.......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었지만 말이에요.”
“어떤 신사 분께서 말씀하시길,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더라고요.”
새하얀 유니콘은 가볍게 대답했다.
“그럼 좋은 밤 되세요, 폐하.”
그녀는 몸을 돌리고 발굽을 옮기려다, 문득 자신이 배웠던 새로운 기술을 떠올렸다.
텔레포트!
그 기술을 습득한 게 아주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래리티는 자신이 밟게 될 지면의 흙을 상상했다. 숙소 주변을 둘러싼 그 적막한 공기와, 매달려 있는 크리스탈을 감싸며 부는 바람을-
눈을 한 번 깜빡이자, 래리티는 숙소 앞에 도착해 있었다. 입구에 드리워진 커튼을 조용히 치운 뒤, 그녀는 아늑한 공간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곤 팔라라우리아에게 받았던 책을 마법으로 안장 가방에 집어넣었다.
래리티는 자신의 이부자리에 들어가 꼼지락댔다. 그러면서도 이불과 담요가 멋대로 흐트러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마침내 최고의 자세를 찾아낸 뒤, 그녀는 양 볼까지 이불을 끌어올리며 눈을 감았다. 쌕쌕대던 숨소리도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
-
“이제 알겠지?”
늘씬하고 새하얀 암말이 말했다. 탁자 위엔 촛불 하나가 덩그러니 타오르고 있었고, 그녀는 그 탁자의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나비 날개는 희미한 불빛만 받고도 이따금씩 빛을 발했다. 새하얀 털가죽에선 생기어린 광채가 흘러넘쳤고, 긴 뿔은 반짝거렸다.
“분명히 봤어요. 이제 알겠네요.”
래리티는 자신의 앞에 놓인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답했다.
“당신은 관용의 원소 그 자체, 즉, 관용의 원소를 완전히 구현해낸 저 자신이군요.”
“정답이야, 자기.”
‘관용’이 답했다.
“나는 가능한 한 가장 큰 관용을 베풀었을 때 될 수 있는 너란다.”
“많은 역경과 고난을 헤쳐내야 할 것 같군요.”
래리티가 요점을 짚었다.
“제 살아생전에 관대함 그 자체로서의 삶을 살아낼 수 있을 지 의문이에요.”
“그래. 쉬운 일은 아닐 거야. 네가 완벽한 관용의 형태를 구현해내지 못할 가능성이 훨씬 크지. 그래도 노력은 해볼 거잖아?”
“물론이에요. 그러고 싶어요. 다른 무엇보다도 그걸 이루고 싶, 잠깐.......아냐. 그건 아니에요. 제 친구들과 더 가까이 지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바래요. 이게 더 말이 되지 않나요? 제 친구들도 다른 조화의 원소들을 하나씩 지니고 있고, 우린 모두 함께 하도록 되어 있으니까요. 혹시 그 아이들도 내면에 당신 같은 ‘원소가 완벽히 구현된’ 형태를 가지고 있나요?”
“분명 그럴 거야.”
나비 날개의 유니콘이 말했다.
“물론, 그건 내가 확언해줄 수 있는 부분은 아니란다. 난 우리 자기 밖에 모르니까 말야.”
“흐으음.”
래리티는 다시 한 번 와인을 홀짝였다.
“그나저나, 역시 이걸 묻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래리티는 맞은편에 앉은 암말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언젠가 저도 당신 같은 모습을 갖게 될 수 있을까요? 당신은.......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멋지거든요.”
“그럴지도 모르지.”
관용이 말했다.
“언젠가 넌 자애롭고 아름다운 나이든 유니콘처럼 보이게 될지도 몰라. 전체적으로 아예 다른 모습을 갖게 될 수도 있고. 네가 포니로 남을지 아닐지조차 말해줄 수 없어. 네가 어디까지 성취하느냐에 따라 달린 일이니까. 하지만 외양은 절대로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네가 무엇을 하느냐 지.”
“전 이제 막 그 성취의 첫걸음을 뗀 참이에요.”
새하얀 유니콘이 말했다.
“당신이 준 천리안이라는 재능, 이건 정말 중요한 거예요. 이건 그냥 재능이 아니라, 책임이기도 하다고 봐요. 더 완전한 관용을 베풀라는 의미로 제게 주어진 거겠죠.”
“정확해.”
관용이 말했다.
“게다가 너도 알겠지만, 아무래도 네가 처음인 것 같아. 내 말은, 네 친구들인 현재 원소 수호자들 중에서 네가 처음으로 재능을 인지했다는 거지. 이건 즉, 네가 친구들을 도와야 한다는 거란다.”
“제가 바로 관용 아니었던가요?”
래리티는 당당히 말했다.
“난 그 애들에게 필요한 건 주저 없이 내어줄 거랍니다.”
관용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할 거라는 거겠지? 네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생각할 여지도 없지. “생각할 여지도 없지.”
래리티 : 관용이 말했다. 이제 그녀는 관용 그 자체와 같은 모습을 띠고 있었다.
난 믿고 있으니까. “난 믿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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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래리티의 입꼬리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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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6.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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